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독일인들이 여전히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작가 ‘괴테(1749-1832)’. 말로만 들었던 <파우스트>를 직접 읽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무서움이 컸다. 첫 번째로, 창피한 일이지만 이렇게 굵은 고전책을 집중해서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필자는 어릴 적에 ADHD가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두 번째로, 얼핏 보기만 해도 쓰여진 글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역시나 읽는 내내 현대지성 편집자가 고생을 꽤나 했겠다는 생각만 들었달까.
필자가 생각하는 책에 대한 전체적인 총평은 이러하다. 두려움이 컸던 것보다 훨씬 더 스토리가 탄탄하고, 스토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메타포가 확실하다. 덕분에 잘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이번 리뷰는 평소에도 영화 속 메타포 찾기를 즐기는 취미를 살려, 개인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 된 요소들을 찝어 추리 및 정리해보는 방식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 메타포들은, 책의 가장 마지막 ‘해제’ 파트에 나와있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pp.660-662)’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미리 알린다.
1. 마법사 파우스트
책을 시작하는 대제목은 <비극>이며, 비극의 서막부터 파우스트를 아끼는 주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인간됨을 두고 내기를 벌인다. 주님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키되, 파우스트가 올바른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악마의 계략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다음장에서는 이 또한 메피스토펠레스의 계략인지, 파우스트 박사가 지식의 인간적 한계를 느끼고 세상 만물을 알 수 있는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필자는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왜 마법사였을까?
중세 유럽에서는, 특히 괴테의 출신인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적으로도 규모가 크고 긴 종교전쟁을 겪은 나라였다. 가톨릭이 국교인 이곳은 가톨릭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므로써, 이에 반(反)하는 것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했다. 파우스트가 되고자 한 마법사(Magi)는 여기서 ‘세상 만물을 다 아는 자’로 표현되지만, 이는 유일신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시의 분위기상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실제로 18세기에 마법사, 악마와 같은 이교도적 객체는 공동체 파괴를 일으키는 존재로 여겨졌다고 한다. 파우스트가 이러한 사회적 윤리에 어긋나는 ‘마법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결국, 종교와 관계 없이 순수한 지식적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 생각된다.
당시 법률가이자 작가, 재상으로 활약하며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줬던 괴테는 1782년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반 기독교인이나 말뿐인 기독교인(Un-Christian)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Non-Christian)이다” 라고. 루터교(개신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이토록 종교적 관념이 엄했던 나라에 살던 그가,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파우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순수한 지식에 대한 욕구는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알리고자 한 괴테만의 반항이 아니었을까.
2. 예술가와 멜랑콜리아(Melancholia) : 파우스트의 여성성
현대에서 예술가(Artist)는 음악, 미술 등 예체능 방면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예술가란 인문학에 뛰어난 학자들을 주로 일컫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예술가들을 천재라 여겼으며, 이들은 너무 박식한 나머지 늘 ‘우울(Melancholy)’에 시달린다고 해석했다. 15-16세기 근세 유럽에서 교회 학자 성인들의 우울을 표현한 작품들을 자주 접할 수 있듯, 우울은 예부터 지식과 뗄 수 없는 인간의 흔한 본성으로 여겨졌다.
괴테가 살았던 18세기 유럽은 세번째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인문학이 성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도 남성 지식인들이 월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교육과 직업의 선택 폭이 넓었던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지적 활동을 할 권리도 없었으며 간혹 지식인 집안에서 자란 엘리트 여성이 예술을 시작해도, 예술가라 말하고 다닐 수 없었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도태된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상이었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인권이 극명하게 다른 분위기 때문에 ‘우울’은 점차 지식인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어갔다. 사회와 종교, 인권에 부딪히던 여성들의 슬픔과 분노는 기득권 남성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
필자는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파우스트가 마법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 괴테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을 표출하고자 한 설정임과 동시에, 파우스트라는 캐릭터 자체의 ‘여성성’을 강조한 장치라고 해석했다. 전술했듯 <파우스트>에서 나타나는 ‘여성성’이 사회와 종교의 가치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우울함이라고 보았을때, 세상 만물을 아는 자는 더 높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못한 ‘하위 것’들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괴테가 <파우스트> 집필에 영향을 준 원인으로 ‘수산나 마르가레타 브란트 사건’을 들고 있음을 감안할 때(p.148), 이 같은 추측은 더욱 그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1) 그레트헨
그레트헨과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여인은 파우스트가 변신한 ‘하인리히’라는 남성과 금단의 사랑에 빠지는 하층 계급 여성이다. 그녀는 ‘혼전 순결’이라는 교회의 도덕을 지키지 못하고 파우스트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주변 시선을 두려워 하게 되고, 결국 아이를 살해한다. 그레트헨의 고뇌가 담기기 전에, 파우스트가 어떠한 여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나는 항목이 바로 ‘발푸르기스 밤’이다.
마녀 처형의 날을 일컫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참가한다. 그 당시 마녀는 금욕과 육욕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온갖 성적 표현이 난무한다. 이 곳에서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마녀와 춤을 춘다. 남성이라면 당연히 현혹 되어야하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름다운 마녀와의 춤을 멈추는 파우스트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성적 매력과 탐욕의 반대 모습을 한 여성에게 눈길을 준다.
파우스트 : (…) 그녀가 천천히 그 장소에서 밀려 나오는 게, 꼭 발이 사슬에 감겨 걷는 것만 같아. (…) 정말이지, 저건 사랑하는 손길이 감겨주지 않은 죽은 여자의 눈이다. (pp.242-243)
파우스트는 처형을 앞둔 여리고 힘없는 여인에게 동정의 눈길을 건넨다. 그는 여인을 보며 그레트헨을 떠올리고, 독자들은 이로 하여금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바로 동정심이다. 파우스트는 한 여인을 사랑으로 꾀하여 비극으로 이끈 속내가 까만 남성이 아니라, 힘 없고 여린 여성을 향한 동정심과 숭고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2) 헬레네
<파우스트>의 ‘비극’ 제 2부에 등장하는 헬레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인 제우스와 인간인 레다의 딸이었다. 그녀는 인간 여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설정으로, 신화 상에서는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왕의 아내가 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파우스트의 아내가 되어 아들 유포리온을 낳는다. 2부에서도 파우스트의 여성성이 드러나는 대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왕인 헬레네와의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
실제 신화에서 헬레네는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장차 왕이 될 남성을 골라야하는 처지에 있다. 하지만 헬레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미를 권력이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두고 칼싸움을 벌이고, 또 벌여야만 하는 상황 자체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가련한 여성이다.
파우스트가 역사적 현실과 미래에 대해 자기 비하적 우울함을 겪던 헬레네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데 성공하면서, 둘 사이에 태어난 유포리온이 태어난다. 하지만 그가 죽게 되면서 헬레네 또한 파우스트를 남겨 놓고 떠나게 되는데, 절망에 사로잡힌 파우스트는 그 상황에서 마르가레테와의 비극을 회상하며 회의감을 표출한다.
파우스트 : (파우스트가 헬레네가 남긴 구름 옷가지를 타면서) (…) 하지만 부드럽고 가벼운 안개 띠가 여전히 가슴과 이마를 감싸니 상쾌하고 시원하며 달콤하구나. (…)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들 솟아오른다. 아우로라(새벽)의 사랑은 가볍게 떠오르며 재빨리 느낀, 제대로 이해 못한 첫 눈길 보여준다. 꽉 잡았다면, 모든 보물을 능가했을 그 눈길을. 어여쁜 그 형태가 영혼의 아름다움처럼 올라온다. 해체되지 않고, 에테르 속으로 올라가며 내 마음속 가장 좋은 것도 함께 데려간다. (p.546)
파우스트는 역설적이게도, 헬레네가 남긴 구름을 타면서 시원하며 달콤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마르가레테와의 비극을 떠올린다. 헬레네와의 사랑으로 권력을 얻은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만족에 대해 질문하자, 파우스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파우스트 : 그런 걸로 난 만족할 수 없다! 백성들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먹고, 심지어 자신을 양성하고, 가르치고— 그래봤자 폭도나 키우는 것 아니겠나. (p.551)
파우스트 이 지구는 위대한 행동을 할 공간을 제공한다.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내야 해. 나는 대담한 근면을 향한 힘을 느낀다. (…) 통치권과 영지를 얻으련다! 행동이 전부지. 명성은 아무 것도 아니야. (p.552)
파우스트의 이러한 대사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일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인다. 따라서 통치권과 영지를 얻는 선택은 그가 자신이 뱉은 말과 다르게 역설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이득을 위해 취하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세상의 모든 하층 계급을 향한 파우스트의 연민과 동정이 반영된 것이다.
3.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갈망
신비의 합창 : 스러지는 모든 것은 오로지 비유일 뿐. 온전치 못한 것이 여기서 사건이 된다.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 행해졌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위로 끌어 올린다. (p.648)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내기에서 진다. 선(善)이라면 해선 안되는 수 많은 오류와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레트헨을 유혹하고, 그녀의 가족을 파멸 시키고, 간척사업을 벌리다 노부부를 살해한 그이지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내기와 달리 악에서 구원받는다. 파우스트가 한 짓의 결과물이 항상 ‘나쁜’, 인륜적으로 삿대질 받아 마땅한 일이더라도 그의 의도는 항상 선했다. 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동정심과 고민이 다소 충동적이었을진 모르겠으나 언제나 서려있었다. 이 책의 역자도 파우스트가 악인이지만 구원 받게 된 이유로서 그가 근본적으로는 항상 올바른 방향을 지키려 애썼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 올바른 방향이란 결국, 그레트헨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상대를 향한 동정심, 근심일 것이다. 괴테가 이를 ‘여성적인 것’이라는 한 가지의 단어로 수많은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담으로 파우스트는 15-16세기에 존재했던 실존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온갖 주술을 외우고 다니는 마법사였지만 동시에 허풍쟁이 취급을 받았었다고. 그의 이야기는 괴테가 살던 시대에 다시 ‘파우스트 전설’로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괴테는 그를 단순한 허풍쟁이로만 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괴테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인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은 실제로도 모두 오해를 사고 다닌 인물이다. 괴테가 그들의 어떤 면에 더 집중하고, 이야기하고 싶어했는지 독자에게 힌트를 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쟁과 승패, 계급, 직위와 같은, 비교하자면 ‘남성적인 것’의 우월성이 최고조이던 시기에 그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진심과 사랑, 순수함과 열정이었다. 남성적인 것이 우세해지면 여성적인 것은 멸시 받기 쉬워진다. 우울함이 여성의 전유물이 된 그 시기, 괴테는 소외된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자 <파우스트>를 쓴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