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우스: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aporia // 2025학년도 수능 윤사 3번

by cusp

아우렐리우스가 신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2025학년도 수능 3번 문항에는 스토아학파 후기 대표적인 사상가인 아우렐리우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비교하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보통 윤리와사상 과목에서 스토아학파가 출제되면, 스토아학파 후기 사상가인 아우렐리우스나 에픽테토스의 사상이 출제됩니다(세네카도 스토아학파 후기 사상가이기는 하고, 교육과정에서 가끔 언급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평가원 문항으로 출제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칼럼에서는 아우렐리우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 후기 사상가들의 전반적인 입장에서 과연 2025학년도 수능 윤리와사상 3번 문항에 있는 한 선지에 오류가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번 칼럼에서 논하고자 하는 선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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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항은 2025학년도 수능 윤리와사상 시험에서 오답률이 59.1%(ebs 통계 기준)로 5위를 기록했던 고난도 문항이었습니다. 평가원은 이 문항의 답을 ④번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문항의 갑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을 사상가는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따라서 평가원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긍정하고 아우렐리우스가 부정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문항을 출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평가원의 판단에 오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상황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지나치게 느끼지도 않고 모자라게 느끼지도 않는 중용의 덕을 습관화할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갑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④번 선지에 대해서 긍정의 대답을 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선지에서 문제가 되는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과연 아우렐리우스가 "이성의 명령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부정의 대답을 할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평가원은 나름 친절하게 을 사상가인 아우렐리우스의 제시문에 "우리는 신과 인간에게 공통된 이성에 따라 행동할 때 두려워할 것도 없고 해를 입을 것도 없다."라는 문장을 제시함으로써, 수험생들이 제시문을 보고 아우렐리우스가 "이성의 명령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부정의 대답을 할 것임을 추측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실제로 자기의 사상을 담고 있는 저서인 <명상록>에서 제시문에 제시된 문장과 비슷한 주장을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들과 공유하고 있는 이성에 순종해서 일을 하고 있다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른 길을 따라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 곳에는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잠복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지금 너의 생애 중에서 여러 단계들, 즉 소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를 돌아보라. 거기에서도 각각의 변화는 죽음이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두려운 것이 있었는가. 이제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시절, 그 후에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시절, 그 후에 양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시절을 돌아보라. 네가 거기에서 겪은 많은 파괴와 변화와 정지를 생각해 본 후에, 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거기에 어떤 두려운 것이 있었는가." 그러므로 너의 삶 전체의 끝과 정지와 변화 속에서도 네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명상록>의 다음 구절들은 아우렐리우스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주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입니다. 아마 평가원은 이런 구절들을 토대로 문항의 제시문과 선지를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아우렐리우스가 정말로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의 감정을 품지 말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신(자연)에 의해서 정해지고 발생하는 외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평가원에서 제작한 선지는 '외부 사건 및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단순히 '두려움'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사실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의 감정을 품지 말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있습니다.


1. 모든 행동을 네 인생의 마지막 행동으로 여긴다면, 온갖 무목적성과 격정에 이끌려 이성적 판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위선과 이기심과 주어진 운명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너도 보다시피 사람들은 몇 가지만 극복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은가!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2. 황제 티를 내거나 궁정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기가 쉽기에 하는 말이다.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하여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철학이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라.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3. 지배적 이성은 어떤 사건을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순간 제자리를 이탈한다. 지배적 이성은 정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경건함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미덕도 공동체 정신에 포함되며, 사실은 정의로운 행동보다 더 존중받아야 한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4. 네가 생을 마감하게 되어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하고 네 지배적 이성과 네 안의 신적인 요소만을 존중하고, 언젠가는 삶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연에 따르는 삶을 시작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면, 너는 너를 낳아준 우주에 어울리는 인간이 될 것이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위 4개의 구절들은 모두 신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4번 구절은 언젠가는 삶을 끝내야 하는 상황인 죽음과 같은 외부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연을 두려워할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우렐리우스의 '두려움'에 대한 언급을 참고해 보면, 평가원에서 제작한 선지는 오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위 4개의 구절은 한글 번역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위에 있는 4개 구절은 천병희 교수님의 번역을 참고한 것이고,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번 구절의 경우,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하신 "너도 보다시피 사람들은 몇 가지만 극복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는가!"라는 문장을 박문재 작가의 경우 "사람이 몇 가지만 잘 이겨내면 경건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는가."로 번역하셨고, 쌔라 강 작가의 경우 "너는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경건한 삶을 위해 요구되는 사항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라고 번역하셨습니다. 천병희 교수님의 번역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어 있고, 박문재 작가와 쌔라 강 작가의 번역은 '신에 대한 경건함'이 언급되어 있는데, 경건함이 보통 두려움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번역의 차이로 인해 1번 구절만을 보고 아우렐리우스가 신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2번 구절의 경우,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하신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해서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라는 문장을 박문재 작가의 경우 "늘 소박하고, 선하며, 순수하고, 진지하며, 가식이 없고, 정의의 친구가 되며, 신을 경외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할 때에는 과감한 사람이 돼라."라고 번역하셨고, 쌔라 강 작가의 경우 "너는 단순하고, 선하며, 순전하고, 신중하며, 가식도 없고, 정의의 친구가 되며, 신을 경외하고, 친절하며, 지혜롭고,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과감하게 수행하는 자가 되어라."라고 번역하셨습니다. 박문재 작가와 쌔라 강 작가가 사용한 '경외'라는 용어는 분명히 어떤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2번 구절을 통해 아우렐리우스가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번 구절의 경우,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하신 "지배적 이성은 정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경건함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박문재 작가의 경우 "이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단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신을 공경하고 섬기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셨고, 쌔라 강 작가의 경우 "지배적 이성은 인간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 못지않게 신을 숭배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번역하셨습니다. 3번 구절도 1번 구절과 유사하게 천병희 교수님이 '두려움'이라고 번역하신 것을 박문재 작가와 쌔라 강 작가는 '공경함'. '섬김'이라고 번역하셨습니다. 공경과 섬김이 보통 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또한 1번 구절과 비슷하게 번역의 차이로 인해 이 구절만으로 아우렐리우스가 신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4번 구절의 경우,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하신 "언젠가는 삶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연에 따르는 삶을 시작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면"이라는 문장을 박문재 작가의 경우 "언젠가는 너의 삶이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자연과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을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면"이라고 번역하셨고, 쌔라 강 작가의 경우 "만약 너의 두려움이 삶을 마치는 것에 있지 않고 본성에 따라 삶을 시작하지 못한 데 있다면"이라고 번역하셨습니다. 이 구절의 경우에는 천병희 교수님뿐만 아니라 박문재, 쌔라 강 작가까지 모두 '두려움'이라고 번역하신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아우렐리우스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공경이나 섬김이 무조건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전제하는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2번 구절과 4번 구절을 통해 아우렐리우스가 신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의 명령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우렐리우스가 무조건 부정할 것이라는 평가원의 판단은 옳지 않고 오류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스토아학파에서 '외부 상황 혹은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비이성적인 정념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정념을 없앨 것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아우렐리우스가 아니더라도 후기 스토아학파 사상가 중에서 세네카 또한 두려움의 정념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세네카는 본인의 윤리학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인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에서 두려움에 대해 언급합니다.


어떠한 상대를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게 때로는 대중일 수도 있고 때로는 원로원에서 세력을 떨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네. 또한 위임된 국민의 권리를 스스로 행사하는 개인의 경우도 있지. 이들 모두를 친구로 삼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며,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

그렇지만 무엇보다 새겨두어야 할 것은, 혼란을 없애고 저마다의 문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확인하는 것이라네, 그러면 두려운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거네. 자네도 알다시피 어린아이에게 곧잘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


그에 비해 얕은 생각에 의해 찬양되고 속된 견해에 의해 선이 되는 것은, 공허한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부풀리는 한편, 마치 악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신에 전율을 일으켜, 외부의 위험이 마치 동물을 혼란시키듯이 정신을 혼란시키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어느 것이나 까닭 없이 영혼을 어지럽히고 물어뜯는다네. 전자가 기뻐할 가치가 있는 동시에, 후자도 두려워할 가치가 있네.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에서 아우렐리우스와 유사하게 죽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절대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구절에서 세네카는 자연스럽게 발생한 외부 사건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세네카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경계하면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지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읽었던 서양철학사 책에는 이러한 세네카의 입장을 잘 나타내주는 서술이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사건들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의 공포를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두려움 외에 우리가 두려워할 일은 없다.
-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를 명시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우렐리우스나 그를 포함한 스토아학파의 입장이라는 판단 하에 제작된 평가원의 선지는 오류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이러한 오류 가능성이 높은 선지가 다시 제작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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