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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03. 2020

'나' 증명서

나는 3개월째 작은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일기도 쓴다. 책도 읽는다.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가- 혹은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면 가끔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 어느 것도 잘하고 있지 않다'는 좌절감에 자주 빠지기 때문일 것이다. 포켓몬 Go와 같은 단순한 육성 게임에 빠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테고. 키우는 햄스터에게도 가끔 과하게 몰입하여 안 끼던 눈곱만 햄스터 눈에 껴도 눈물을 흘려댈 지경이다. 나는 쉽게 공감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고 쉽게 상처 받는다. 그렇지만 나는 쉽게 웃지 않는다.


나는 책 읽는 게 좋고, 나무가 좋고, 집에서는 예쁘게 만들어지지 않는 꼬수운 라테를 카페에서 홀짝거리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나의 직업이 될 수 없다. 


결혼 전에 나는 영어 회화와 문법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 겸 과외 교사였다. 나는 일주일 내 노동시간이 35시간도 되지 않는 노동자였다. 나는 적게 벌고 (비교적) 적게 썼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34세이지만 명품가방이 없고 무엇이 비싼 브랜드인지는 알지만 사지는 않는다. 못한다.


나는 이력서에 적을 긴 말이 없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갈 때까지 함께 교회학교 교사로 동고동락했지만 그런 건 이력서에 적을 수 없다. 선교활동을 하러 지진이 난 아이티에 가서 복구작업을 하고 뙤약볕에서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지만, 뉴욕에서 마약 중독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사람들과 삶을 얘기하며 수프를 나누며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았지만, 하와이에서 노숙인 친구와 남이 남긴 음식을 먹다 머리카락이 나와 킬킬거리며 웃었어도 지금 그것은 모두 과거일 뿐이고 그런 건 이력서에 적을 수 없다. 


내가 반 사회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성격적 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업차 아는 사람도, 거래처 사람도, 워크숍에서 친해진 직장 동료도 없다. 어쩌면 누군가가 보기에 나의 세계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런 나는, 매우 자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해야 할 위기에 놓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도 단조롭고 큰 보상을 주는 것들이 아니기에 나는 주로 단순한 사람으로 판단된다. 나는 착한 사람이고, 그렇게 큰 특징이 없으며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일정 부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새로운 사람 앞에서 뿐만 아니라 오래된 친구 앞에서도 타인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꾸 변한다. 우린 서로를 잘 모른다. 내 앞에 피어있는 이 꽃이 나도 모르는 새에 더 많은 잎을 가지게 된 걸 모른다. 


나는 자주 내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속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거인들과 같이 내 삶에 거대한 폭풍과 비바람과 천둥번개는 없었어도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에서 혼자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던 나무처럼 살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어떤 관계는 자연스럽다. 어떤 관계는 꾸역꾸역 한쪽의 희생과 양보 혹은 집착으로 이어져간다.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우리는 이력서를 내밀지 않는다.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는 내 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을 증명서 같은 것에 담아 보여주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었던 관계는 어쩌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 적어질수록, 내가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몸담고 있지 않을수록, 나를 어떤 사람으로 소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커지는 것 같다. 나는 그냥 그때마다 '초록색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영어를 좋아하고 일기를 자주 쓰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려고 결정했다. 뭐 그거 외에 달리 쓸게 없기도 하지만, 그거 외에 나를 표현할 방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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