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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Jun 04. 2021

착한 내가 싫어

"나는 너무 착한 거 같아. 나는 착한 내가 싫어."


 남편과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한 말이다. 남편은 그렇다고 했다. 민주는 착하다고. 

서른 다섯 해를 보내며, 참 착하게 바르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우리 세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학창 시절엔 조금이라도 규율에서 벗어나면 혼나고 맞았다. 중학교 땐 주머니 많이 달린 가방을(섹시 라이언인가. 2000년대 초반 유행하던 가방이 있었다.) 멘다고 등굣길에 교문에서 맞았고, 선생님께 말대답한다고 뺨을 맞았고, 고등학교 때는 지각한다고 맞았고, 야자 시간에 돌아다닌다고, 화장실을 허락 없이 갔다고, 야자 끝나는 종이 치지도 않았는데 가방을 쌌다고 맞고, 혼났다.(후, 쓰면서도 어이없네.) 당시를 떠올려보면 선생님 말 잘 들을걸 하는 생각 반, 왜 때리고 지랄이야 하는 반항기 어린 마음 반- 해서 내 감정도 굉장히 싱숭생숭했던 거 같다. 특히 고등학교 땐 학부모회에서 스승의 날 선물로 선생님들께 '사랑의 매'라는 이상한 나무 막대기를 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들 차원에서 폭력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참 괴상한 풍습이었다. 


 과거의 내가 과거의 나로 끝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랬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준다. 나만의 의견을 갖게 되고, 글을 많이 읽고, 쓰려고 하면서 나는 자주 '착한 나'의 사슬에 걸린다. 이런 글을 쓰면 누군가가 싫어할 텐데, 저격하는 줄 알면 어쩌지,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해서 나를 멀리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적 공간에만 머무는 나의 일부를 공적인 영역으로 드러냈을 때 드는 두려움이다. 특히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는 목사님, 전도사님, 교회 친구들 등 내 생각이 이렇다고 말했을 때, 나의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 자칫 내가 너무 반동분자(?)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의견을 내는 것보다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자 겸손함으로 치환되는 곳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고, 나눌 수 있을까. 나는 끝내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쓰고자 하는 글, 하고자 하는 말을.


 꼭 내가 학교에서 혼나고, 맞았다고 해서 지금처럼 착한 사람이 된 건 아닐 거다(?). 뭐, 타고난 성격도 있을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모습이 괜찮으니까, 결국은 내가 '선택'한 순간의 내가 모여 지금의 '착한' 내가 된 거겠지만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안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도 보지 않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이 투명하고 좁은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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