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기 고백적, 신앙과 관련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의 나에게 가장 큰 모욕과도 같은 충고는 "결혼해야지, ""정착해야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 말을 건넨 사람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나는 큰 일을 할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2010년에(당시 20대 초반이었다) 참가한 선교 여행에서 나는 하와이, 뉴욕, LA, 할리우드, 아이티 등의 장소에 머무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와이에서는 그 동네에서 만난 Nate라는 청소년 노숙인과 친해져서, 그의 휴대용 게임기로 철권을 하기도 하고 같이 해변가에 앉아 몇 시간씩 얘기도 나누고, 누군가가 그에게 주고 간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다가 머리카락이 나와서 같이 깔깔 거리며 웃기도 했다. 나는 내가 노숙인들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만큼 Nate와의 우정은 특별했고 소중했다. 뉴욕에서는 Astor Place라는 장소 근처에 살았었는데, 쿠퍼 유니온이라는 유명한 대학 바로 옆 건물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숙소는 오래된 우크라이나 교회로 지하가 예배당이었고 우리 팀원들의 숙소는 2층이었다. 대도시 맨해튼에 있는 숙소임에도 침대가 없어서 우린 각자의 침낭 속에 들어가 잤다. 뉴욕은 굉장히 추웠다. 우리는 월드비전 창고에서 짐을 정리하기도 하고, 패션계 사람들이 모인 성경공부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하기도 하고, 타임스퀘어에서 쌩판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기도 했다. 아이티에서는 극심한 더위 때문에 고생했다. 그곳에서 허락된 유일한 오락은 코카콜라 한 병이었다. 우린 당시 지진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를 전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을 만나 성경책을 전달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손때 묻은 NIV 성경을 전해받은 한 아이티 남성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이티에서는 제공받은 식사를 제외하고 돈을 쓸 곳이 없었다. 그래서 콜라 사 먹는 것 외에는 돈이 들지 않았다. 나는 거의 1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따로 오락거리가 없으니 심심하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일기를 쓰고 성경책을 읽었다. 아이티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8시에 잠을 자고 4시에 일어나 숙소 안(꽤 컸다. 베이스캠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을 산책했다. 모든 빨래는 손으로 빨았다. 나는 내가 한국에 와서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디서도 할 수 없었던 자극적인 경험들을 하고 돌아온 나에게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시시했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모두 괴로웠다. 3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해서도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데, 떠나야 되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허송세월을 낭비하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들이 내 마음을 뒤덮었다. 나는 절박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인을 보내시는데 내가 잡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혼이나 연애도 하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큰 일'을 할 사람이니까. 그 이후로도 계속 내적인 방황은 계속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건 하나님이 허락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을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방문한 여러 선교지에서, 이건 감히 나에게 허락된 사명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니까.
뜬구름에 줄곧 고정되어있던 나의 시야는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나에게 당장 맡겨져 있는 일들을 했다. 알바를 하고, 대학원을 가고, 과외를 하고, 영어시험도 봤다.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챙기고, 보듬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이곳이 선교지이다-그 생각으로 살았다. 그 생각으로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비장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점차 변해갔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렇게 몇 해를 살다 보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모험은 아마존 탐험이 아니라 일상을 사는 것이 되었다. 매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모험이 없었다. 지금 나의 삶이, 끝까지 이렇게 평온하리라고,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새로운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지만 주어진 날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에게 맡겨진 궁극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