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춘 찰나, 뒤늦게 열린 광덕사의 시간의 문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우리는 가끔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틈'을 기대하며 길을 떠납니다. 일상의 소음이 지워진 자리에 낯선 감각이 채워지길, 혹은 멈춰버린 시간이 불쑥 고개를 내밀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충청남도 천안, 태조산의 품에 안긴 광덕사를 찾은 이유도 아마 그 '시간의 문'을 찾고 싶어서였을지 모릅니다.


무심코 지나친 초입, 낯익은 풍경들

광덕사로 향하는 길,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호서제일선원(湖西第一禪院)'이라는 묵직한 현판이었습니다. 호서 지역에서 가장 으뜸가는 수행 처소라는 그 당당한 선언을 지나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시간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천 년의 역사도,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실되었다가 다시 일어선 인고의 세월도 그저 활자로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보았지만, 뷰파인더 너머의 풍경은 그저 정물처럼 평범하기만 했습니다. "오늘은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구나"라는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절집을 돌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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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진 길 끝에 고요하게 서 있는 '호서제일선원' 일주문의 흑백 사진. 거대한 노거수들이 마치 호위하듯 문 주변을 감싸고 있으며, 길 위에는 고요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멈춤의 순간, 비로소 열린 틈

그렇게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숲길의 끝자락, 아까 지나왔던 그 일주문 앞에 다시 섰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아득해졌습니다.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 소리가 잦아들고, 계곡의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리가 멈추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시간의 문'이 열렸습니다.

흑백의 프레임 속에 갇힌 풍경은 더 이상 현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주문 너머로 보이는 빛은 과거의 어느 날로 인도하는 통로 같았고, 굵직한 나무 기둥들은 그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증인처럼 다가왔습니다. 고려 시대 류청신 선생이 가져와 심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 전설이, 그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수행자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다시 걷는 천 년의 기억

나는 홀린 듯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공기였습니다. 조금 전 무심히 지나쳤던 삼층석탑의 거친 질감에서 신라의 숨결을 느꼈고, 대웅전 앞마당에 떨어지는 햇살 속에서 이름 모를 석공의 정성을 읽었습니다.

광덕사(廣德寺)라는 이름처럼, 넓고 큰 덕이 시간을 넘어 나를 감싸 안는 기분이었습니다. 시간의 문은 억지로 찾으려 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마음을 비우고 돌아설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곁의 시간의 문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순간'을 맞이하는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광덕사 숲길 끝에서 만난 그 찰나의 고요는 나에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멈추는 곳에 머무는 것"이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 한구석에는 광덕사에서 가져온 작은 시간의 문 하나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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