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부도 매바위에서 마주한 시간의 문, 비어있음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경기도 화성시의 작은 섬, 제부도는 제게 언제나 '가까우면서도 먼 곳'으로 기억됩니다. 수도권에서 차로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바닷길은 오직 자연이 허락한 시간에만 그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밀물과 썰물의 리듬에 맞춰 열리고 닫히는 그 길은, 우리에게 약간의 번거로움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매번 물때표를 확인하며 공들여 찾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오히려 제부도를 다른 여행지와는 차별화된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줍니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혹은 문득 일상으로부터의 도망이 필요할 때 저는 제부도로 향합니다. 운 좋게 바닷길이 열려 있다면, 마치 세상이 저를 반겨주는 듯한 기분 좋은 힐링이 시작됩니다.


[짙은 먹구름 아래 장엄하게 서 있는 제부도 매바위와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의 흑백 풍경]

바닷길을 건너 섬의 왼쪽 끝자락으로 달리면, 마침내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바위'와 마주하게 됩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드러난 광활한 갯벌과 제각각의 모양을 한 거친 자갈들은 마치 태초의 지구를 걷는 듯한 신비로움을 선사합니다. 수만 년의 세월 동안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냈을 바위의 주름진 표정에서 형용할 수 없는 경외심이 느껴집니다.


매바위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바위와 바위 사이가 만들어낸 틈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곳을 '시간의 문'이라 부릅니다. 그 좁은 틈 사이로 시선을 멀리 던지면,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현대의 유조선조차 먼 옛날 돛을 달고 유영하던 범선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실의 시계가 멈추고, 상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찰나입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시야를 가로막는 인공적인 건축물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거친 대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순간, 저는 '비어있음'이 가진 묵직한 무게를 체감합니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그 광대함 속에서, 비로소 제 안의 복잡했던 생각들도 그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부도의 매바위는 제게 말해줍니다. 가끔은 꽉 채우려 애쓰는 삶보다, 바다가 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텅 빈 공간이 주는 고요를 즐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입니다.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겼던 그 짧은 여운은, 다시 일상을 살아갈 커다란 힘이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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