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속 1,600년의 시간의 문, 강화도 전등사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안개가 자욱한 새벽, 강화도의 품에 안긴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 산사는 온통 하얀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길을 오르며, 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딘가를 걷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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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자욱한 전등사 마당과 고목의 실루엣이 담긴 흑백 사진]


눈앞에 펼쳐진 전등사의 앞마당은 그야말로 정지된 공간이었습니다. 움직이는 생명체도,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공기 중에는 그 어떤 향기도, 미세한 바람의 결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진공 상태'였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이었으나, 안개 너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비현실의 영역으로 밀려난 듯했습니다.

그 적막함 속에 가만히 서 있자니, 갑자기 안개의 뒤편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보이지 않던 절집의 건물들이 서서히 그 형태를 드러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제된 듯했던 목조 건물에서 오래된 나무의 향기와 단청 도료의 냄새가 훅 끼쳐 왔습니다.

오감을 깨우는 그 감각들은 저를 순식간에 '시간의 문' 너머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시대에 창건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 전해집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발걸음이 안개 속에서 환청처럼 되살아났습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염불 소리, 그리고 사각사각 마당을 밟는 사람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

과거의 어느 시점과 현재의 제가 맞닿은 이 신비로운 순간, 기묘한 고양감이 차올랐습니다.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던 삼랑성의 비장함도,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내던 숭고한 정신도 결국은 하나의 본질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품어온 '믿음'과 '소망'이라는 본질은 이 안개처럼 변함없이 이곳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유유히 그 신비로운 안개 속을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습니다. 나무의 향기, 산사의 바람, 사람들의 소리가 안개를 매개로 제 온몸에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의 문을 닫고 다시 돌아오는 길, 제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안개 속에서 흡수한 생명력은 일상을 살아갈 새로운 의욕이 되어 가슴 속에서 넘실거립니다. 비현실의 공간에서 건져 올린 현실의 희망, 전등사의 새벽은 그렇게 저에게 잊지 못할 생의 감각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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