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풍경 속 겹겹의 시간, 예산 추사고택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충청남도 예산의 완만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덧 시야가 확 트이며 단정한 고택의 자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잘 정돈된 주차장과 기념관이 이곳이 이름난 관광지임을 상기시켜 주지만, 그 소란함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숨결이 깃든 이곳, 추사고택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낯선 '고요'입니다.

DSC_0508_추사고택.jpg

[울창한 고목 아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담과 살짝 열린 작은 나무 문이 대비를 이루는 흑백 사진]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고택의 뜰에는 세상의 소음이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듯합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가만히 앞을 내다봅니다. 나무들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옛 담장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정겹게 시야를 채웁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구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그 여유로운 움직임에 마음의 긴장이 풀립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어깨 위로 내려앉자,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찰나의 정지, 그리고 열린 시간의 문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조금 전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흐르던 구름은 제자리에서 멈추었고,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소리가 소거된 진공의 상태. 그 정막 속에서 건너편 옛 담장 한가운데 난 조그만 쪽문 사이로 눈부신 빛의 조각들이 일렁이며 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홀린 듯 일어나 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천천히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곳은 제가 알던 21세기가 아니었습니다. 밭을 가는 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이름 모를 시절의 하얀 옷을 입은 농부들이 땀방울을 훔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 멀리서는 댕기 머리를 땋은 소년들이 해맑게 웃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라기보다는, 이 장소가 기억하고 있는 '겹겹의 시간'이 잠시 문을 열어준 것 같았습니다.


역사가 보내는 따뜻한 선물

사람들은 말합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다고. 하지만 오래된 장소에는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삶의 궤적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고 그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시간의 문은 비로소 우리에게 그 틈을 내어줍니다.

추사고택에서 경험한 그 짧은 꿈 같은 시간, 고단한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세월이 보내준 다정한 손짓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예산의 조용한 고택에서 시간의 문을 열고, 잊고 지냈던 정겨움과 따뜻한 위로를 한 품 안고 돌아옵니다. 여러분에게도 잠잠히 마음을 내려놓고 시간의 문을 마주할 공간이 있나요?

작가의 이전글태안 신두리, 모래 위에 새겨진 과거와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