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충청남도 예산의 완만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덧 시야가 확 트이며 단정한 고택의 자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잘 정돈된 주차장과 기념관이 이곳이 이름난 관광지임을 상기시켜 주지만, 그 소란함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숨결이 깃든 이곳, 추사고택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낯선 '고요'입니다.
[울창한 고목 아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담과 살짝 열린 작은 나무 문이 대비를 이루는 흑백 사진]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고택의 뜰에는 세상의 소음이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듯합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가만히 앞을 내다봅니다. 나무들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옛 담장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정겹게 시야를 채웁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구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그 여유로운 움직임에 마음의 긴장이 풀립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어깨 위로 내려앉자,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조금 전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흐르던 구름은 제자리에서 멈추었고,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소리가 소거된 진공의 상태. 그 정막 속에서 건너편 옛 담장 한가운데 난 조그만 쪽문 사이로 눈부신 빛의 조각들이 일렁이며 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홀린 듯 일어나 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천천히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곳은 제가 알던 21세기가 아니었습니다. 밭을 가는 소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이름 모를 시절의 하얀 옷을 입은 농부들이 땀방울을 훔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 멀리서는 댕기 머리를 땋은 소년들이 해맑게 웃으며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라기보다는, 이 장소가 기억하고 있는 '겹겹의 시간'이 잠시 문을 열어준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다고. 하지만 오래된 장소에는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삶의 궤적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고 그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시간의 문은 비로소 우리에게 그 틈을 내어줍니다.
추사고택에서 경험한 그 짧은 꿈 같은 시간, 고단한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세월이 보내준 다정한 손짓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예산의 조용한 고택에서 시간의 문을 열고, 잊고 지냈던 정겨움과 따뜻한 위로를 한 품 안고 돌아옵니다. 여러분에게도 잠잠히 마음을 내려놓고 시간의 문을 마주할 공간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