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신두리, 모래 위에 새겨진 과거와 현재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태안의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달립니다. 길은 점점 깊숙이, 조금씩 후미진 곳을 향해 들어섭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 때쯤, 어느 막다른 곳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광활한 모래밭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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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펼쳐진 광대한 신두리 해안사구. 모래 위에 길게 늘어선 나무 기둥들이 바다를 향해 정렬해 있고, 저 멀리 섬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정적인 풍경]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해안 사구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텍스트로 배웠던 지식을 단숨에 초월합니다. 압도적인 규모 앞에 서면 인간의 언어는 잠시 힘을 잃습니다. 평소라면 태안 바다의 푸른 빛과 사구의 반짝이는 베이지색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며 상쾌한 회화의 한 장면을 연출했겠지만, 오늘 이 풍경은 흑백의 프레임 안에서 더욱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바다새의 날갯짓, 넘실거리는 파도,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바람에 몸을 흔드는 모래알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뿜어냅니다. 그 생명력에 이끌려 모래밭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뎌 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다는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거대함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어느 순간, 숨을 고르기 위해 뒤를 돌아봅니다. 방금까지 살아 움직이던 모든 풍경이 거짓말처럼 한 점의 정물화로 고정됩니다. 그때 아까와는 다른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다의 비릿함과 묘한 달짝지근함이 섞인 바람. 그 바람은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우리를 과거로 안내합니다.

저 멀리 홀로 남겨진 나무 배와 모래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그물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 옛날, 이 광활한 모래밭을 터전 삼아 치열하게 삶을 일구었을 어부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때도 지금도 모래는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문을 뒤로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순간, 해안 사구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같은 장소인데도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 우리는 이 해안 사구라는 캔버스 위에서 과거와 현재의 '틀린 그림 찾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억겁의 시간이 쌓인 모래 언덕 위에서, 우리는 그렇게 잠시 멈춰선 채 나만의 시간을 기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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