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고요를 만나다 : 당진 능안생태공원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당진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사람들은 으레 서해의 푸른 바다나 화려한 삽교호의 대관람차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당진의 진면목은 바다를 등지고 내륙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번잡한 일상의 소음이 잦아들 무렵, 시골길의 끝자락에서 만난 능안생태공원은 마치 세상이 숨겨놓은 비밀 정원 같았습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인공의 소리가 아닌 짙은 숲의 호흡입니다. 이곳 '능안'이라는 이름은 과거 이 근처에 묘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부터 죽은 자의 안식처이자 산 자의 성소였던 이 땅은, 이제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시금 휴식을 권하고 있습니다.


숲의 터널에서 만난 정적

우거진 나무들이 제각각 가지를 뻗어 만든 초록의 터널로 발을 들입니다. 길은 좁고 깊어, 걸음마다 발밑의 흙이 사각거리며 인사를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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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 사이로 보이는 호젓한 정자의 모습. 흑백의 대비가 숲의 질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길 끝에 놓인 정자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 멀리 숲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는 정자 하나가 보입니다. 기와지붕의 곡선은 완만하고, 그 너머는 짙은 숲에 가로막혀 컴컴한 어둠이 깔려 있습니다. 마치 그곳이 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혹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낮은 휘파람 소리를 냅니다. 수풀 사이로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지나가는 야생의 소리가 귓가를 울릴 때, 비로소 내가 자연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실감합니다.


시간의 문을 열다

정자를 향해 다가갈수록 공기의 밀도가 달라짐을 느낍니다. 정자 너머, 숲으로 막혀 있던 그곳에 다다르는 순간, 거짓말처럼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어둠은 간데없고, 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동시에 그토록 소란스럽던 새소리와 바람 소리, 숲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춥니다. 그곳은 소리가 지워진 '진공의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어디인가?"

뒤를 돌아보아도 전봇대 하나, 주차장의 흔적, 인공적인 울타리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문명과 단절된 완벽한 원시의 공간. 두려움이 앞설 법도 한데, 묘하게도 마음은 더없이 안온해집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는 수천 년 전의 숲이 머금었을 법한 태초의 순수함이 배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세상, 더 푸른 희망

한참을 그 정적 속에서 걷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시간의 문'을 통과해 다시 현실로 발을 내딛는 순간, 세상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색채로 다가옵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풍경보다 더 환하고, 더 푸른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능안의 숲은 내 안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자리에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어주었나 봅니다.

당진의 내륙, 능안생태공원에서의 산책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고요를 찾아 떠난 짧은 여행이자, 나를 되찾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이 소란스러워질 때면, 나는 언제든 이 비밀스러운 시간의 문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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