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덕주산성의 견고한 성벽을 지나 굽이진 길을 걷다 보면, 마침내 산의 품에 안긴 덕주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묵묵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곳. 충청북도 제천의 깊은 산세 속에 자리 잡은 이 절집은, 입구에 피어난 노란 꽃밭의 생경한 명랑함마저 금세 고요함으로 치환해 버리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흑백으로 담긴 덕주사 처마의 유려한 곡선과 그 아래로 펼쳐진 월악산의 능선, 그리고 정적을 머금은 마당의 풍경]
인적 없는 경내, 처마 밑 작은 그늘에 몸을 기대어 봅니다. 눈앞으로는 충청도의 골 깊은 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머리 위로는 맑은 바람이 풍경(風磬)을 건드려 찰랑이는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청명한지, 마음속에 고여 있던 소음들이 단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이곳 덕주사는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의 슬픈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나라를 잃은 뒤 월악산으로 들어와 마애불을 새기며 그리움을 달랬던 공주의 마음 때문일까요. 덕주사의 공기는 유독 밀도가 높고, 시간의 흐름은 유독 느릿하게 흐르는 듯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요. 바람이 잦아들며 풍경 소리가 멈춘 일순간, 기이한 경험을 합니다. 일렁이던 나뭇가지도, 흐르던 구름도 멈춰버린 듯한 찰나의 정적. 그 진공 같은 고요 속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산 아래 저 멀리서부터 줄지어 걸어오는 스님들의 낮은 행렬 소리, 법당 안에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염불의 진동, 그리고 마당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쓸어내리는 보살님들의 부지런한 발소리까지. 현대의 소음과는 결이 다른, 아주 오래전부터 이 공간에 박제되어 있던 소리들이 공명하며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지금 내가 마시는 이 공기는 수백 년 전 덕주공주가 마셨던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소멸하는 세상에서, 덕주사는 여전히 '청명한 기운'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풍경이 울립니다. 환청 같던 과거의 소리들은 다시 시간의 문이 닫힌 정적 뒤로 숨어버렸지만, 제 마음속에는 이 맑은 울림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공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험, 그것이 바로 깊은 산속 덕주사가 여행자에게 건네는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