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잔잔한 남한강의 물길이 조용히 굽이치는 곳, 평온한 일상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특별한 시간 여행을 예고합니다. 익숙한 공원 입구를 지나 흙먼지 날리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탑으로 향하는 야트막한 돌계단 앞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경계에 서는 순간, 주변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백색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며 뺨을 스치는 공기의 온도가 묘하게 서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낡고 투박한 돌계단은 평범한 현실에서 벗어나 저를 아득한 과거로 이끄는 한 편의 기행문이자, 비현실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시간의 문입니다.
태양을 이고 선 고독한 거인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를 때마다 이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는 듯합니다. 마침내 문을 넘어 마주한 석탑은 눈부신 태양을 등진 채 거대하고 압도적인 실루엣을 뽐내며 우뚝 서 있습니다. 하단부에서 시작된 시선이 층층이 쌓인 탑신을 타고 자연스럽게 꼭대기와 태양으로 향하며, 수직으로 뻗어 나간 탑의 웅장함이 시야를 빈틈없이 채웁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자리를 지켜온 고독함과 영속성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릅니다.
[역광 속에 깨어나는 천 년의 영원, 하늘을 향해 뻗은 묵직한 염원]
태양의 강렬한 빛무리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 귓가를 때리던 바람의 결이 달라집니다. 눈을 뜨니 저는 어느새 8세기 후반 통일신라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강물 위로는 남한강의 거친 물살을 가르며 활발한 수운 교류를 이어가던 나룻배들의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토의 정중앙을 확인하기 위해 남과 북의 끝에서 동시에 출발해 걸어왔다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 흙바닥 위로 흩어집니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천 년의 숨결
하늘을 찌를 듯 14.5m 높이로 솟아오른 통일신라 최대 규모의 7층 석탑 주위로, 승려들의 나직하고 장엄한 불경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갑니다. 주변을 감싼 경건한 침묵 속에서, 왕권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돌을 정교하게 다듬고 기단을 세우던 옛 장인들의 숨결과 피어오르는 짙은 향내음이 시공간을 넘어 제 콧잔등을 맴돕니다. 훗날 고려 시대의 사람들이 다시 이 자리를 찾아 소중한 청동 거울을 탑 안에 봉안하며 간절한 소망을 덧대었던 것처럼, 이 탑은 그저 차가운 돌덩이가 아니라 수많은 시대의 염원이 겹겹이 쌓인 생생한 역사 그 자체입니다. 시대를 역류하여 뿜어져 나오는 지극한 기도의 에너지가 타임슬립을 한 제 온몸을 감싸며 일상의 탁한 마음을 맑게 씻어 내립니다.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귀환
다시 불어온 차가운 강바람에 흩날리던 통일신라 승려들의 가사 자락이 아지랑이처럼 점차 투명해지고, 남한강 위로 부서지는 눈부신 윤슬이 눈에 다시 맺히며 저는 현재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거대하고 고독한 석탑이 뿜어내던 경건한 분위기는 여전히 제 곁을 맴돌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다시 시간의 문을 닫고 돌계단을 걸어 내려왔을 때, 제 손목시계의 초침은 변함없이 일상의 속도대로 째깍이고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그 장엄한 역사만큼이나 조금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역사의 파동을 품고 묵묵히 서 있는 중앙탑에서의 시간은, 바쁘게만 흘러가던 제 삶에 건네는 가장 지적이고도 따뜻한 위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