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평온한 일상을 벗어나 충남 서산 해미읍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조용한 시간 여행을 기록하는 한 편의 기행문과도 같습니다. 익숙한 아스팔트 길을 걷다 거대한 돌기단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진남문 앞에 서는 순간, 등 뒤로 흐르던 현대의 번잡한 소음이 아득히 잦아듭니다. 육중한 아치형 성문을 통과하는 찰나, 주변 공기의 온도가 서늘하게 바뀌며 다른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미세하고도 신비로운 떨림이 온몸을 감쌉니다.
문을 넘어서자 이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훨씬 느리고 무겁게 흐르는 듯합니다. 성벽 안쪽의 넓은 빈터에는 화려한 색채가 배제된 듯 차분하고 쓸쓸한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전통 건축물의 우아한 처마 곡선 곁으로, 잎을 모두 떨군 거대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비스듬히 서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낡은 기록의 냄새가 묻어납니다.
[수백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낡은 고목이 침묵 속에서 건네는 처연한 위로]
마치 누군가 저를 부르는 듯한 이끌림에 나무 곁으로 다가갑니다. 거칠게 갈라진 나무껍질에 조심스레 손을 얹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일렁이며 시공간이 뒤틀립니다. 저는 어느새 1866년 조선 후기의 낯선 시간 속으로 타임슬립하여 서 있습니다. 평화롭던 공터는 스산한 바람으로 가득 차고, 귓가에는 낮고 희미한 신음과 간절한 기도 소리가 겹쳐서 들려옵니다. 병인박해를 전후로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바로 이 '호야나무'에 매달려 참혹한 고문을 견뎌냈던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입니다. 축축한 흙먼지 냄새와 함께 피어오르는 짙은 슬픔의 향취가 코끝을 스치고, 두려움 속에서도 빛나던 숭고한 영혼들의 눈빛이 허공을 맴도는 듯합니다.
본래 이곳은 조선 전기부터 축조되어 왜구를 막아내던 충청 방어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훗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머물며 무관의 기개를 펼치기도 했던 늠름한 읍성은, 수백 년이 흘러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피를 묵묵히 품어낸 거대한 순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비극과 신앙의 고결함이 뒤섞인 이 공간에서, 저는 그들이 겪어낸 고통의 깊이를 헤아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시공간을 넘어 들려오는 굳건한 신념의 메아리가 제 내면의 탁한 기운마저 씻어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힙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옷깃을 흔들자, 환영처럼 맴돌던 과거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다시 고요한 현재의 해미읍성으로 돌아옵니다. 바티칸으로부터 국제 성지로 공식 승인받을 만큼 평화롭고 정돈된 지금의 풍경 이면에 이토록 짙은 아픔이 배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없이 숙연해집니다.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과거를 가르던 무거운 성문을 되돌아 나오며 다시 일상의 눈부신 햇살과 마주합니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내 손목시계는 불과 두어 시간 전을 가리키며 변함없이 째깍거렸지만, 마음의 시간은 그들이 남긴 천년의 숨결만큼 조금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역사와 신념이 깃든 이 시간의 문 안에서의 경험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짙은 잔상으로 남아, 제 삶의 발걸음을 한층 차분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