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빽빽한 도심의 소음을 뒤로하고 맑은 하늘을 이정표 삼아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성역을 알리는 붉은 칠의 홍살문 앞에 서는 순간, 귓가를 맴돌던 현대의 부산스러운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고 서늘한 솔바람이 뺨을 스칩니다. 마치 일상의 균열 사이로 조선 시대라는 낯선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묘한 떨림이 일었습니다. 오늘은 단순한 산책이 아닌, 15세기의 숨결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 영원의 시간을 묵묵히 호위하는 능선의 석조물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뿜어내는 짙은 솔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흙길을 사박사박 걷습니다. 이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훨씬 느리고 무겁게 흐르는 듯합니다. 능선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로, 왕릉을 묵묵히 호위하는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수의 웅장한 실루엣이 나타납니다.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이 배제된 자리에는 공간이 가진 본연의 무게감과 엄숙함이 고스란히 채워져 있습니다. 그 경건하고 묵직한 풍경 앞에 가만히 서자, 시공간의 물리적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며 마침내 500년 전의 낯선 공기 속으로 완전한 타임슬립을 한 듯한 감각이 밀려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 소리는 어느새 궁궐 뜰을 거니는 옛사람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로 변하고, 저 멀리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정자각 너머로는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계신 영릉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눈앞에 펼쳐진 영릉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왕과 왕비를 한 봉우리 안에 모신 동봉이실 형태의 합장릉입니다. 원래 서울 대모산에 있던 능을 풍수지리상 천하의 명당이라는 이곳 여주로 천장하면서 조선 왕조가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는 야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옛이야기처럼 솔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합니다.
눈을 감으니 어디선가 훈민정음의 둥근 글자들을 정성스레 읊어 내려가는 나지막한 소리와, 백성의 하늘을 읽고자 했던 해시계 위로 떨어지는 따사로운 볕의 온기가 아스라이 느껴집니다. 글을 몰라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겼던 성군의 짙은 애민 정신, 그리고 문화와 과학 전반에 걸쳐 찬란한 빛을 피워냈던 그 열정적인 숨결이 차가운 석조물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아 저의 어지러운 마음까지 뭉클하게 정화해 줍니다. 세상에 남겨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 오늘 이 과거의 시간 속에서 오롯이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온몸으로 짊어졌던 위대한 인간의 다정한 온기였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숲을 빠져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들어올 때 넘었던 붉은 홍살문을 지나 다시 현실의 포장된 길 위로 걸음을 옮깁니다. 뒤를 돌아보니 거창한 시간의 문은 온데간데없이 평화로운 능선의 실루엣만이 노을빛 속에 고요히 남겨져 있습니다. 조용히 시간의 문을 닫고 일상으로 걸어 나왔을 때, 제 손목시계의 바늘은 겨우 두어 시간 남짓 변해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500년의 지혜를 품은 채 그 어느 때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의 숨결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말 없는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