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을 찾아서
일상의 소음이 잦아드는 수변의 곁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의 궤도를 잠시 벗어나, 충남 예산으로 짧은 기행문을 써 내려가듯 훌쩍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굽이진 시골길을 지나 예당저수지의 수변 산책로 어귀에 다다르는 순간, 공기의 질감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귓가를 때리던 뾰족한 도시의 자동차 소음은 이내 잦아들었고, 대신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물안개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수몰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채 고요한 수면에 발을 담그고 있는 풍경. 젖은 흙을 밟으며 그 물가로 다가서는 찰나, 저는 팽팽했던 현실의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열려 있던 시간 여행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데칼코마니가 빚어낸 시간의 정적
[수면의 데칼코마니가 빚어낸 고요한 수묵화 같은 예당의 오후]
물안개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풍경은 마치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린 다른 차원의 세계 같았습니다. 가느다란 가지를 복잡하게 뻗어 올린 나무들이 잔잔한 수면에 거울처럼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하늘과 물의 경계를 지운 채 시각적인 확장감을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생명력이 깊이 숨을 죽인 계절 특유의 황량함 속에서도, 자연이 빚어낸 기하학적인 선들은 차분하고 깊은 평화로움을 자아냅니다. 물결의 미세한 떨림 외에는 어떤 미동도 없는 이곳의 시계바늘은 바깥세상보다 한참이나 느리게 흐르는 듯했습니다. 숨소리조차 내기 조심스러운 그 정적 속에서 저는 낯설고도 신비로운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물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역사의 숨결 어느 순간 묘한 현기증이 일더니, 제 주변의 공기가 수십 년 전의 과거로 회귀하여 타임슬립을 한 듯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하던 귓가에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아스라한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흙을 파내는 거친 땀방울 소리가 환청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예산의 '예'와 당진의 '당'을 합쳐 이름 붙여진 이 거대한 호수는 1929년 일제강점기에 착공되어,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기 속에 10년 넘게 공사가 중단되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964년에야 비로소 완공된 척박한 세월의 흔적이 수몰나무의 거친 껍질마다 훈장처럼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물안개 자욱한 과거의 한가운데 서서, 끈질기게 버텨온 짙은 흙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며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과 무게를 가만히 느껴보았습니다.
현실로 돌아온 발걸음, 깊어진 마음의 시계 "쏴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분수 소리와 웅장하게 뻗은 출렁다리를 걷는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에 흠칫 놀라며 저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습니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던 짙은 안개가 걷히고, 예당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현대적이고 활기찬 명소로서 찬란한 윤슬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뒤를 돌아 현실과 비현실을 갈라놓았던 산책로 어귀의 문을 닫고 일상으로 향합니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고작 한 시간 남짓 차이 날 뿐이었지만, 굽이치는 역사의 시간을 온몸으로 건너온 제 마음속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깊고 단단해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