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바다, 화성호에서 마주한 영겁의 기록

시간의 문을 찾아서

by Black and Navy

궁평항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렘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설렘이 가끔은 낯선 정적 속에서 경건함으로 변할 때가 있습니다. 화성호를 마주하는 순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는 바다였던 과거와 호수가 된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뒤섞인 묘한 경계에 서 있습니다.

[흑백의 색조 속에서 전선 너머로 새들이 날아가고, 끝을 알 수 없는 갈대밭과 호수가 어우러진 화성호의 전경]

시선을 낮추어 갯벌의 결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빚어내던 파도의 흔적은 이제 단단한 땅이 되었거나, 낮은 물길이 되어 멈추어 있습니다. 이 순간, 하늘을 흐르던 구름의 움직임도, 날개짓하던 새의 자취도 멈춘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소거된 듯한 공간. 그곳엔 철썩이는 바다의 소리도, 코끝을 스치는 갯내음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감싸는 것은 완전한 침묵뿐입니다.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길

화성호는 1991년 시작된 화성방조제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입니다. 거대한 방조제가 바닷길을 막으면서,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곳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곳에서 나는 가장 원초적인 자연의 시간을 마주합니다.

우거진 갈대밭을 헤치고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 마치 '시간의 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가 잦아들고 나면, 억겁의 세월이 나를 환대합니다. 이곳에서 1분은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지고, 내가 살아온 짧은 생애는 광활한 대지 앞에 작은 점이 됩니다.

멈춘 듯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대지의 호흡. 화성호는 단순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묵묵히 품어내고 있는 거대한 기록 장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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