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소설의 기형적 진화
요즘 서점가에는 영화나 드라마의 포스터를 표지로 사용하는 책들이 많아졌다. 어떤 책은 곧 개봉할 영화 포스터를 앞세워 재출간하기도 한다. 그러한 마케팅은 소비자의 시선을 끄는데 제법 성공적이다. 하지만 감독의 명성과 영화적 이미지가 원작자의 의도에서 멀어지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전달되는 이미지는 다음 장부터 펼쳐질 첫 단어, 첫 문장을 이미 처음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할 여지를 준다. 이때의 이미지는 소비자로 하여금 이 책이 영화적일 것이라는 데에 선험적으로 개입한다. 언어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이 같은 출판시장 체계는 독자 영역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 구조는 원작자의 영역까지 침범할 가능성을 가진다. 역사는 언제나 희박한 가능성으로부터 이행되어 왔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타락이라는 말을 쓰는데 예술작품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던 아우라는, 기술적으로 작품을 대량 복제할 수 있으면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의 타락이 그렇듯 아우라의 붕괴는 산업사회로 들어선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아우라는 기형의 형태로 더러 살아남았다. 이를테면 영화의 몽타주가 그것인데, 여러 개의 단편들이 마치 헤겔의 변증법을 기초한 것처럼 숏과 숏의 충돌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형 속에 시네 로망 ciné-roman이 있다.
시네 로망은 알랭 레네 감독의 <지난해 마리 앙바드에서>가 196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후 사회적 신드롬이 되었다. 이 작품은 60년대를 관통하여 70년대 누보로망을 이끌어나갔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알랭 로브그리예는 1963년에 발표된 [불멸의 여인]의 서문에서 “한 편의 시네 로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에 이르렀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책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지 못한다. 책이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보고 듣듯이 기술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질투]는 출판 해에 746부가 팔렸을 정도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앙드레 말로, 사르트르, 까뮈, 조르쥬 바타유 등에 의해 회자된다. 그의 문장은 마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듯 엄격하게 객관화되어 있다. 이는 화자의 광적인 집착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낯설고 이질적이다. 화자의 아내인 A… 는 이웃 프랭크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가 (차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하룻밤을 자고 온다. 이 간략한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독자는 이 소설의 문체가 선사하는 강렬함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로브그레예의 문장은 기하학적인 단어들이 도형을 그리듯 세밀하면서도 정교하게 공간을 창출한다. 화자는 결코 주관적인 비유나 판단을 하는 일이 없다. 이 소설에는 단 한 번도 화자가 자신의 심정이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 속에서 우리는 화자의 ‘질투’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야 한다. 극적 몰입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질투]는 반대로 카메라의 시선을 이용함으로써 화자의 존재와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로브그리예는 이를 통해 카메라 ‘렌즈’와 화자의 ‘시선’을, 기계의 ‘감정 없음’과 화자의 ‘감정’에 일치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에서 거꾸로 화자를 바라보게 되고 심지어 그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받는다. 로브그리예의 말을 빌려보면 ‘영화에서 누보로망 작가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카메라의 객관성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것, 꿈이나 기억에 다름 아닌, 한마디로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명백한 객관의 외형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메라의 가능성이다.’ [질투]는 화자의 시선을 마치 정교한 카메라처럼 보여주되, 시간과 공간은 뒤엉켜서 편집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디까지나 카메라는 객관의 가능성이자 화자의 상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시네 로망’이라는 기형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낸다. 화자는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움켜쥔 듯 아프고 위태롭다. 그럼에도 질투의 감정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의 정렬은 날이 선 듯 차갑다.
또 다른 시네 로망의 기수인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뒤라스에게 공쿠르 상을 안겨준 [연인]은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남자가 베트남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한 때를 그리고 있다. 자신의 가장 뜨거웠던 때를 기억해 내야만 하는 늙은 화자는 문득, 그 순간, 우리를 책장 사이에 멈추게 만든다. 그러다 문단 사이로, 문장 사이로, 한 단어에 내포된 치밀한 통증으로 휘말려 그녀의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 소설가도 유산을 물려받긴 하지만 대부분은 깊은 멜랑콜리를 가지고 물려받는다. 이는 기억에 관련한 벤야민의 말인데, 기억은 서사시적인 것의 예술적 변형물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연인]은 죽음 앞에 선, 기억의 편린들이다. 기억이란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언젠가는 잊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 기억은 그들이 가진 전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뒤라스는 기억의 조각들을 시간의 굴레에서 꺼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녀가 각본을 쓴 알랭 레네의 첫 장편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역시 기억에 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남녀가 벌이는 정사를 담아낸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함축한다. 이 영화는 프랑스인 ‘그녀’와 일본인 ‘그’의 사랑이 죽음의 기억들로 (원폭 후의 방사능, 혹은 검은 연기처럼) 번지는 아픔 그 자체이다. 그들이 만나는 <카사블랑카>라는 술집은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와 그녀는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며 일말의 기대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마지막 대사는 우리가 기억으로부터 완벽히 해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히로시마(일본)”, “당신의 이름은 느베르(프랑스)” <히로시마 내 사랑>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경계에 존재한다.
시네 로망의 두 기수인 로브그리예와 뒤라스가 알랭 레네와 함께 펼친 시간과 공간의 변주는 단순히 소설과 영화를 접합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접점을 찾고, 충돌시키며, 단절하는 반복된 행위, 즉 수행적인 자세다. <지난해 마리 앙바드에서>는 현실이 반복되고, 실제 경험과 상상 체험을 뛰어넘는 이미지들이 ‘정신적인’ 시공간을 창출하는데, 이와 동시에 오르간의 음향과 주인공의 내레이션,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환상을 향유하는 기분을 들게 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그와 그녀, 동양과 서양의 경계, 그들의 언어, 그들의 (마치 죽음 같은) 기억을 융합시켰다, 다시 분리하는 작업(마치 원자처럼 가장 작고도 강렬한 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꿈의 시공간이며, 기억의 시공간이며, 감정적인 생의 전체적인 시공이다.
소설과 영화는 언어와 이미지라는 각기 다른 기호 양식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시네 로망은 소설과 영화를 모두 ‘읽는 것’이라 제시한다. 더 정확히는, 시공간을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시네 로망의 언어가 영화의 카메라처럼 세계를 보고, 세계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로브그리예와 뒤라스 이후 소설은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영화에서 역시 이미지가 하나의 언어로써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ciné-roman의 ‘-’은 영화와 소설, 즉 이미지와 언어를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해체, 융합하는 접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문학이 영화를 통해 넓혀나갈 수 있는 지표이며, 영화가 문학을 통해 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