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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Oct 02. 2016

소파에 앉은 아이들

- Amat Escalante,  <HELI>


 다소 논쟁적인, 무척 태연한 영화 <헬리>   

  

  칸 영화제(66회)의 감독상을 수상한 아마트 에스칼란테 감독의 <헬리>는 수상의 찬반논쟁을 이끌며 가장 뜨거운 영화가 되었다. 그 결정은 심사위원단에서도 큰 논란이지 않았을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끈 경쟁부문의 심사위원단 중 감독만을 살펴보면, 이안, 림 렌지, 크리스타안 문쥬가 있다. 그들의 행적만 가지고는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와 이안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문제적 감독으로 대변되는 <케빈에 대하여>의 림 렌지와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크리스티안 문쥬는 할리우드와는 확연히 다른 성향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설마 수상작 선정을 위하여 멱살잡이라도 했겠냐만은, 저마다 상반된 폭력에 대한 성찰과 의식으로 미뤄봤을 때 논쟁이 펼쳐졌을 거라 짐작하는 것도 영화제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과연 어떤 영화이기에 이렇게 논란의 불씨를 붙였던 것인지 칸의 현지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씨네필들은 이 영화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군홧발에 짓눌린 한 남자(헬리)와 하얀 러닝을 입은 또 다른 남자(베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화면 밖에는 알 수 없는 잡담과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작은 트럭 위에서 거의 죽어가고 있다. 트럭은 육교 밑 한적한 도로에 멈추고 정체모를 사내들이 두 남자를 끌고 육교로 올라간다. 사내들은 헬리를 육교 위에 버려둔다. 하지만 베토에겐 가혹하다. 아니, 잔인하다. 아니, 태연하다. 그들은 베토의 바지를 벗기고 목에 밧줄을 묶어 육교 아래로 떨어트린다. 베토의 시체는 육교에 매달린다. 사내들은 트럭을 타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간다. 이제 카메라는 트럭의 짐칸 위에 위치하여 육교를 바라보게 된다. 트럭은 매달린 시체를 응시한 채, 어쩌면 냉정한 무응시로 멀어진다. 이 두 남자가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는 폭력의 절정으로 가기까지, 헬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한다. 자동차 공장의 평범한 노동자 헬리는 우연히 옥상의 물탱크에서 코카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여동생 에스텔라의 남자친구인 베토가 숨겨둔 것이었다. 헬리는 에스텔라가 위험한 일에 연루될 것을 걱정하여 코카인을 모두 물웅덩이에 버린다. 이내 정체모를 사내들이 나타나 아버지에게 총격을 가하고 헬리와 에스텔라, 그리고 베토까지 모두 납치한다. 문제는 납치범이 끌고 간 한 장소에 있다.

     

  식탁에 오른 소보루 만큼이나 일상적인 폭력

     

  그 공간은 평범한 가정집의 응접실이다. 아이들은 TV에 연결된 패드를 손에 쥐고 게임을 즐기고 있다. 장정들이 두 남자(헬리와 베토)를 데려오자 세 명의 아이들은 뭔가 더 재미난 것이 생겼다는 듯 소파에 모여 앉는다. 그들의 보모로 보이는 한 여자가 기웃대기도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는다. 사실 이 방 안에서 카메라의 관심 대상은 딱히 없다. 그저 간식 시간에 식탁에 오른 소보루 빵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그 방에 있는 이들의 얼굴, 나이, 상태는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그들의 악마성이 아닌, 평범함에 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유대인을 학살한 자들을 가리켜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했다. ‘말의 무능력, 생각의 무능력, 판단의 무능력’이 납치범들의 공간에 존재한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납치범의 얼굴에 그려진다. 그 얼굴들은 그저 마땅히 그러해야 함을 실천하듯 헬리와 베토에게 몽둥이질을 하고 성기에 술을 부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그저, 마땅히, 그러해야 함. 이 단어에는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악이 존재한다. 그들의 사고 체계는 무사유성, 즉 일종의 마비가 된 것이다. 이것이 현 멕시코의 실정이라는 데에 이 영화의 윤리적 의식과 영화적 형식이 충돌한다.     


  소파에 앉은 아이들 

    

  소파에 앉은 아이들을 조금 더 세밀하게 묘사해야 할 것 같다. 납치범은 세 명의 아이들에게 총이나 몽둥이를 건넨다. “자, 네가 해봐.” 첫 번째 아이는 몽둥이를 들고 베토의 등을 내려치지만 뭔가 어설프고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잘 해내고 싶어 한다. “다음은 네 차례야.” 두 번째 아이는 거의 어른의 폼을 닮아 있다. 마치 야구선수가 스윙을 하듯이 유연한 자세로 폭행한다. 두 번째 아이는 결국 칭찬을 받는다. “이젠 네가 해봐.” 세 번째 아이는 총이나 몽둥이를 거절한다. 그 거절의 순간은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아이의 혼돈과 망설임과 분노와 두려움은 찰나적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왜냐하면 관객은 모두 베토, 헬리와 같은 인질이 되어 그 방 안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어쩌면 작은 희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그 아이에게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그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와 세 번째 아이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차츰 더 나아진 스윙을 가지게 될 아이와 훗날 대타자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또 다른 인질을 끌고 올 납치범이 될 이들에게서 파시즘적인 스놉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던 한 아이, 몽둥이나 총을 건네자 찰나의 거부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 아이에게 있다. 감독은 이를 묵인해버리지만 희박한 윤리적 가능성이 어쩌면 이 영화의 이유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아이가 영웅심을 발휘해 집단이 분열을 일으키고, 힘을 발휘하는 그러한 진정성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단언하건데 비단 멕시코 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 다른 아이들     


  아이의 불안을 묵인하는 감독의 판단은 미학적으로 옳았을까. 그의 선택은 헬리의 가족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에 대부분의 서사를 할애한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폭력의 장면은 단 10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잔상은 결코 10분이 아닐 테지만…….) 폭력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헬리는 다시 일상적인 세계로 편입된다.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운다. 인과의 논리 없이 납치범으로부터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헬리의 여동생 에스텔라는 말을 상실한다. 어쩌면 청각의 상실인지도 모르겠다. 에스텔라는 소파에 앉아 있는 게 그녀의 삶이 되었다. 

  폭력의 하루 위로 어느덧 시간의 더께가 앉아가고 있는 걸까. 창이 활짝 열린 집에서 헬리는 아내와 섹스를 한다. 사건이 있기 전만해도 원만하지 못했던 섹스였지만 그제야 가능한 것이 되었다. 에스텔라는 조카를 껴안고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다. 이 소파 위에 앉은 아이들에게 들리는 것은 남녀가 뒤엉킨 신음소리 뿐이다. 아니, 그것은 관객에게만 들린다. 에스텔라는 정말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언어를 상실한 것일까. 듣지 않으려는 것일까, 말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엔딩이 인상적인 영화다. 화면 밖으로 헬리와 아내의 섹스 소리가 들린다. 거실에 열린 창문으로는 바람이 들어온다. 감독은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인물들은 이제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고, 풍성하게 바람을 껴안은 커튼은 부풀어진다. 하지만 풍성한 커튼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비어있는 것과의 대화는 존재할 수 없다. 침묵만이 그저 대화를 대변한다. 다만, 창문이 열려있다는 것, 바람은 아직도 불어온다는 것, 커튼이 그것을 감싸 안아 실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 그 구체적인 형상들이 한 장의 이미지처럼 나에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법 앞에서 그것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보통의 인간처럼 나는 법관을 지키는 문지기의 등을 여전히 응시할 수 없다.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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