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t on a hot tin roof
그 모든 몸짓과 언어는 찰나의 어둠에서 시작한다. 관객과 배우가 하나의 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다고 믿는 그 점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연극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선 오월, 트램을 타고 야라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강물을 노랗게 물들였고, 그 위로 이름 모를 새떼가 군무를 펼쳤다. 높은 빌딩에 알알이 박힌 전구도 눈을 깜빡이듯 제각기 불을 밝혀냈다. 지역 신문을 뒤적이다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가 공연된다는 소식을 읽게 되었다. 소극장 공연이라면, 더군다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이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극장이 위치한 돈캐스터는 트램을 타고 1시간이 넘도록 가야 하는 거리였고, Playhouse는 정류장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호주에서 1시간의 이동거리는 크게 먼 것도 아니었지만 차가 없는 나는 도심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좀처럼 드물었다. 멜버른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내에는 뮤지컬을 위한 공연장이나 대형 극장 이외의 곳은 찾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상업중심지구이다 보니, 돈이 되는 작품들이 공연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이곳의 문화에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기에 발견하지 못한 건지도 몰랐다. 길을 걷다 작은 계단 아래에 숨어 있던 카페를, 서점을, 레코드 가게를 우연히 발견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리는 빗방울의 감촉이 달리 느껴지는 그러한 날이나, 바람이 자꾸만 내 몸을 휘감아 이리저리 흔들어놓는 날, 커피 향이 눈을 맑게 해주어 감각이 살아나는 그런 날에는 이처럼 유명한 극작가가 신문 한 귀퉁이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기다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날리는 먼지를 마셔가며 연기를 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건 마치 빠르게 되넘기는 오래된 잡지의 철 지난 사진처럼 정처 없고, 다소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아련하게 내 마음을 찔러대고 있어, 나는 얼른 트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는 어두워져 갔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무대 위의 조명 핀처럼 어두운 도로의 한 귀퉁이를 비쳐댔다. 나에게는 ‘짓’이라는 극 창작 집단에 속해있던 적이 있었다. 한 마디의 대사 속에 세상을 담아내려 애써본 밤이 있었으며, 무대 위의 찬란함과 무대 뒤의 공허함을 소주잔에 털어 넣어 취해본 날들이, 비틀거리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나만의 청춘을 열연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다, 그건 내가 보낸 스무 살의 전부였다. 나는 극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적도 너머의 나라에서, 도로 위를 내달리는 신기한 트램을 타고, 거꾸로 된 계절을 따라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왠지 모를 이질감에 시선을 분리해 트램의 밖과 안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이쪽에, 그리고 기억의 대부분은 저쪽에 존재했지만, 역방향의 의자에 앉아 있어서일까, 지나간 풍경은 보다 오래도록 눈에서 달아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정류장을 향해 거꾸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과거는 늘 닿을 듯 말 듯 멀어져만 갔고, 미래는 등 뒤에서 자꾸만 옷깃을 잡아채는 것이다. 어느새 해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암전.
막상 극장에 도착하자 과거는 책갈피처럼 머리칼만 빼꼼히 내민 채로 덮여버렸다. 대합실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극장 측에서 준비한 위스키가 샷 잔에 담겨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연극을 보기 전, 몸에 쌓인 긴장을 풀어줄 심산인 듯 보였다. 나는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더 긴장하여 화장실만 다녀오곤 객석으로 입장했다. 숨을 골라내고 있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객석으로 들어왔다. 직원이 마지막 관객을 앉힌 이후에야 커튼을 쳤다. 불이 꺼지기 전, 무대에 세팅이 된 소품들을 바라보았다. 정돈되지 않은 침대 위 침구류와 고동색 소파와 간이의자, 수납장과 그 위에 올려진 4병의 위스키, 그리고 목발. 무대의 가구 배치와 소품의 활용만으로도 이 연극은 설명이 가능했다. 테네시 윌리암스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 준 이 작품은 한여름 밤, 미국 미시시피 주 델타 지역에 사는 부유층 가정의 분쟁을 다루고 있다. 빅 대디는 암으로 곧 죽을 위기에 놓여 있지만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병명을 숨긴 채로 그의 생일 파티를 주최한다.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빅 대디의 환심을 사려 서로를 헐뜯고, 심지어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해댄다. 빅 대디의 작은 아들 브릭은 풋볼 선수였지만 동료이자 친구인 스키퍼가 죽은 이후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술에 젖어 산다. 그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내 매기는 이 가족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환유되는 것이다. 나는 영어가 걱정되어 미리 공부해둔 대본을 상기하며 무대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불이 꺼졌다.
잠시 동안 불이 꺼진 그 틈, 그 어둠, 동공이 빛을 받으려 힘껏 제 몸을 열어보지만 기대와는 달리 어떤 현상도 인지할 수 없는 그러한 암흑의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관객들과 배우와 연출자와 이 극장의 주인조차도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리는 델타 지역에 와 있지 않다. 지금이 1955년도 아니거니와 배우들이 아무리 미국 남부 특유의 경쾌하고 발랄한 억양을 써댄다 해도 이곳은 호주 멜버른의 돈캐스터라는 지역이다. 무대 위에서 마셔대는 위스키는 홍차를 식혀둔 건지도 모르고, 발을 다쳐 목발 없이는 지내지 못하는 브릭은 연극이 끝나면 정상인처럼 걸어 다닐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다시금 불이 켜지면, 관객은 이 극장 안에 펼쳐질 모든 일들을 진짜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한 몰입은 극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만든다. 어떤 연극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제가 아니니 그러한 의심이 관객의 사고와 자각을 돕길 바란다. 또 다른 연극은 관객을 조롱하기도 하고, 부조리한 몸짓들로 관객들을 당혹시켜버린다. 그 모든 몸짓과 언어는 찰나의 어둠에서 시작한다. 관객과 배우가 하나의 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다고 믿는 그 점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연극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은 결국 오롯이 배우만의 몫이 아닌, 관객과 함께 이뤄내는 종합 예술이다. 나는 이 연극의 한 일원으로 토요일 밤의 한 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다. 어찌 이러한 여행길을 마다할 일이 있겠는가. 트램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왔지만 극장에 도착한 이후 나는 또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연극이라는 위대한 철도의 한 부분이 되어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달려오던 위대한 열차를 견인해나가는 것이다. 암전 끝, 불이 켜지는 순간, 극장은 더 이상 극장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