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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Sep 14. 2016

숨의 발견

파리의 묘비들

그들의 묘비에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때면 숨을 한껏 몰아쉬며 파리의 차가운 공기를 더없이 마셔댔다. 나의 발걸음은 그들에게서 멀어지며 더욱 가벼워졌다. 파리의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숨을 들이마시듯, 나를 받아들였다.     



  묘지를 마주하면 숨을 참아라.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곤 토장을 위해 선산으로 가던 중 누군가 내게 말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의 무덤 곁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기이하게 꺾어진 허리와 아래로 떨어뜨린 머리와 땅을 치는 주먹과 절규, 내 안에 있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전에 본 적 없던 아버지의 처절한 울음 앞에서 거대한 공포로 변해버렸다. 나는 숨을 참다 이내 아버지처럼 울었다. 이후로도 무덤을 마주하면 바보처럼 코와 입을 막은 날이 여러 번이었다. 무덤이라는 그 자그마한 공간을 중력도 공기도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이질적인 세계를 귀띔해준 건 나에게 숨을 참으라고 일렀던 시골 어르신이었지만 내가 믿고 따름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세계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죽음은 그렇게나 가까이, 아마도 일찍부터 내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는데도, 결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여행 중에도 무덤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등산 중에 마주한 작은 무덤부터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무덤까지, 어느 하나 편히 지나칠 수 있는 건 없다.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떠나간 자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비애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고작 서너 평수 남짓한 흙더미라는 사실 때문인 걸까. 엄마의 자궁에 두고 온,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비로소 찾은 기분이 들어서일까. 아무리 꿰맞추려 해도 생의 퍼즐은 늘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에서야 비로소 성기게 비어있는 공허의 틈이 채워질 런지. 아니다, ‘죽음은 작은 얼음덩어리에 불과하다.’ 그저 무용(無用)의 상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유일한 진리는 누구도 결코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무덤을 마주할 때마다 손톱 끝이 차갑게 아려올 때가 있다.     



  내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사흘을 온통 묘지를 찾아다니는 데 쓴 이유에 대해선 지금으로서도 정확한 이유를 찾기가 힘들다. 우선은 존경하는 스승의 여행법-고백컨데 나는 유럽의 그 어느 매혹적인 공간보다도 묘지에 끌리곤 했다. 첫 여행지 지중해 세트의 해변의 묘지에서 나는 죽음으로 새로 태어나는 싱싱한 삶을 보았고, 베네치아 리도 해변에서 나는 죽음과 맞서는 사랑의 불온한 공기를 마셨으며,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나는 죽음의 관조에서 오는 심적 평온을 얻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만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비롯해 유럽의 대성당들 역시 이들 묘지와 다름없지 않은가. 또한 묘지와 마찬가지로 박물관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책은 유럽 묘지 기행이자 유럽 박물관 기행, 곧 유럽 예술 기행의 다른 형식인 셈이다.-을 지표로 삼고자 했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 아님 나를 사로잡은 예술가들에 대한 사랑의 한 방식이었을 테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오래된 도시의 깊숙한 이면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는 묘비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사흘 내도록 숨을 죽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이른 아침부터 꽃을 파는 노점에서 지도를 한 장 사서는 무작정 페르 라셰즈 묘지로 들어섰다. 구름은 흐르지 않고 낮게만 머물렀다. 2월의 찬 공기가 묘지를 스산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낙엽을 쓰는 묘지의 관리인과 지도를 들고 이곳을 찾은 이십 대의 동양인이 오직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묘비는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낮게 누워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묘비의 이름들을 읽어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불어의 이름을 읊조리며 잘 정돈된 묘비의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디선가 헌책방에서 날 법한 오래된 냄새가 났다. 그건 언제부터 자라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겨울나무에서, 채 꺼지지 않은 양초에서, 날갯짓하는 비둘기에게서 나는 것일까. 냄새는 바람에 실려 두터운 코트의 단춧구멍 속으로 들어와, 코끝에 머물다 갔다. 이 넓은 묘비에서 보들레르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솟구쳤다. 그를 찾는 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신념을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건 시인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낯선 도시를 홀로 여행하는 나의 상태가 마치 길을 잃은 내 청춘이 겪는 불안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강렬하고 슬픈 그 무엇인 것이다.’ 시인조차도 차마 설명해내지 못해 써둔 ‘그것’, ‘그 무엇’이라는 대명사들은 주체나 목적을 명확히 지시하지 못한 채로 그저 강렬하고 슬픈 감각만을 남기고야 만다. 어쩌면 가장 명확한 지시어로써 말이다. 그의 무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무엇’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하지만 보들레르는 한참 동안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질을 하던 관리인이 나에게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였다. 그의 몸집은 나보다 훨씬 컸지만 얼굴에 주근깨가 뿌려져 있어서인지 위협감을 주진 않았다. 그는 불어로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왔고, 나는 연신 익스큐즈 무아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소통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 속에서 나는 시인의 이름을 꺼냈다. 그는 앞장섰다. 어느 구역으로 나를 데려다줄 때까지 그는 끝까지 무언가를 설명해내려 애썼다. 그건 보들레르에 관한, 어쩌면 ‘악의 꽃’에 관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묘지의 한쪽 벽의 끝과 끝을 관리인과 함께 걸었다. 지도의 방향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한 묘비를 가리켰다. 그리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를 뒤로한 채 보들레르의 묘 앞에 섰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그건 보들레르를 드디어 마주한 데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관리인이 내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 그 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는 분명 숨을 참으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숨을 참으라고 했던 그 어르신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이 죽음 앞에 선 나를 지배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자리 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사흘에 걸쳐 페르 라셰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이 세 개의 묘지를 걸었다.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나를 움직였던 예술가들의 죽음 앞에서 이리저리 말을 걸고 서성이기도 했다. 숨을 참은 채였다. 그들은 내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고, 어떤 길도 찾아주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누워만 있었다. 그 단단한 침묵 앞에서 나는 끝없이 묻기만 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게 다였다. 그들의 묘비에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때면 숨을 한껏 몰아쉬며 파리의 차가운 공기를 더없이 마셔댔다. 나의 발걸음은 그들에게서 멀어지며 더욱 가벼워졌다. 파리의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숨을 들이마시듯, 나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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