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평사리에서 프랑스 그라스까지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 것, 즉 독서는 한 공간으로의 진입이다. 그건 마치 여행과도 같다. 짐을 꾸리고, 열차의 표를 끊고, 새롭게 만나게 될 도시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고, 그곳으로 향하는 일은 책을 손에 쥐고 제목을 기억하고, 첫 장을 넘겨 작가와 인사하고, 첫 문장에 멈추어선 첫 단어와 그다음 단어 사이의 공간 속에서 설레는 일, 사실 그건 여행이다. 그렇기에 나는 종종 소파나 욕조나 침대에 누워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나는 새로운 공간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묘한 흥분을 느낀다. 잠시 지칠 때는 책갈피를 끼운 뒤에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책은 영화가 요구하는 시간(running time)을 강요하지 않는다. 언어는 종이와 잉크 속에 갇혀 있지만 어느 때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나는 그러한 여행지를 창조해낸 훌륭한 작가들을 흠모한다. 나는 그들이 직조해낸 세계 속에서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은 없다. 작가는 한 공간의 창조자이며 그들이 써낸 소설은 한 공간에 대한 정확한 응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 그 안에서 언어는 능력이 아니다. 언어가 말하지 않는 곳, ‘그곳’에서 이미 그 언어는 말하고 있다. 이때 ‘그곳’은 모든 물질이 움직이고 질서 하는 순수한 소우주적 공간이자 언어가 본질의 무(無)로 돌아가는 공간이다. 즉, 공간은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의 공간은 권력관계라든가 문화적 헤게모니와도 관련되어 있다. J. A. 케스트너의 경우 선, 점, 면까지 구성 요소로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나 소설 속에서 구체화된 장소(혹은 지역)는, 저마다의 인물들을 객관성을 가진 물리적 공간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공간의 개념과는 공통적이면서도 다각적인 효과를 유도한다. 또한 인물의 심리적 세계를 환기시킬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금각사』(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닌, 화자 ‘나’의 내면을 구체화시켜 놓은 정신적 건축물이다. 그렇기에 금각사를 태우는 건 단순한 방화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의 장소란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사건의 가능성 역시 내재하고 있다. 어떤 장소에 대한 의식적 애착과 그 장소의 정체성에 따라서 작품의 생명력은 달라진다. 소설의 공간을 확인하는 여정은 문학이 도달한,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짚어주는 이정표와 같다. 또한 일상의 공간을 소설화하는 작업 역시 창작의 한 가지 길이 될 터이다. 프라하는 카프카와 쿤데라의 공간이며, 베네치아는 토마스 만의 공간이다. 우리는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를 읽으며 런던의 골목을 걸을 수 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로 크레타를 항해할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의 문장으로 흑백의 <이스탄불>을 그려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사로 에치고유자와(니가타 현)를 뒤덮은 <설국>을 상상할 수 있다. 이뿐인가 <메밀꽃 필 무렵>이면 이효석의 고장 봉평을 찾고 싶고, 순천만을 지날 때면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의 안개가 떠오른다.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은 서울시 길음동을 70년대 미아리로 붙들고 있으며 천운영의 「눈보라콘」은 부산의 신선동을 추억 속에서 꺼내 준다. 시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진의 프레임이나 영화의 편집기술은 오히려 공간을 폭력적으로 제한한다. 쇼트가 지속되는 동안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시적인 환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소설의 공간은 다른 매체의 한계점을 뛰어넘는다. 특정 지역의 장소와 장소성이 소설의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순간, 그곳에는 소설가의 표정이 담긴다.
특정 장소를 소설의 공간으로 이뤄내는 것은 낯섦과 익숙함을 우리의 삶 안으로, 문학을 일상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새로운 공간 역시 없다. 하지만 같은 공간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김애란 작가는, 공간에 대한 사유는 곧 시간에 관한 사유라는 강영숙 작가는,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소설가들은 도시, 지역, 장소가 구체적인 생명성과 문화성을 획득하는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어느 소설의 공간은 풍경이나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또 다른 소설의 공간은 멜랑꼴리 그 자체이다. 소설이 내게 와인이 되기도 하고, 초콜릿이 되기도 하며, 친구가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반대로 여행이 내 감각을 일깨워준다고 여기게 된 것은 소설을 읽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소설과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다. 그렇기에 나는 매일 또 다른 문장을 찾아 떠난다. 이 여행의 마침표가 찾아올 때에는, 가난한 내 청춘의 발걸음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나는 누군가의 여행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