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시간에 배웠던 진정한 쾌락

에피쿠로스 학파를 기억하나요?

by 세리



“큰애가 영어 문제 하나가 이해 안 된다고 해서 지문을 같이 보는데 에피쿠로스 학파가 나오더라고. 우리 예전에 공부했던 것 같은데..”


“앗,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그 반대는 스토아학파였잖아요.”


“아니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러게.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대화에서 과거 중학교 윤리 시간이 소환됐다. 당시 나는 지방 소도시의 한 사립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에 막 들어간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던 그때, 나는 각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는 것에 내가 비로소 중학생이 됐다는 것을 실감했다. 빈틈없이 메워져 있던 학급 시간표에 쓰인 과목들을 보면서 대부분은 무엇을 배우는지 가늠할 수 있었지만 윤리란 과목은 낯설었다. 늘 뻔한 소리만 배웠던 도덕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과목이려니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윤리 시간. 머리에 몇 올 안 남겨진 머리카락을 애처롭게 수평으로 딱 붙여놓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게 만들었던 윤리 선생님은 자신이 앞으로 윤리를 가르치겠노라고 덤덤하게 소개했다. 우스꽝스러운 머리 모양과는 다르게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담백한 어투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선생님이 특별히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마지막 수업까지 우리에게 존댓말을 했다는 이유가 크다. 자연스레 반말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여느 선생님과는 다르게 윤리 선생님은 그것이 자신의 ‘윤리’의 첫걸음 인양 절대로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첫 달의 긴장감은 학생들이 모든 수업 시간에 깨어있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이후로는 슬금슬금 수업 시간에 엎어지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단연 윤리 시간은 수면 시간으로 명명하기에 가장 적절했다. 선생님의 나긋한 목소리와 학생의 그 어떤 태도도 존중한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는 말투에 아이들은 죄책감 없이 엎드려 단잠을 자곤 했다.


아직 사춘기의 열병을 앓기 전이었던 나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재밌었다. “윤리 수업 너무 재미있지 않아?”라고 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대꾸하는 눈빛에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진 못했다.


하루는 그리스 시대의 역사와 철학을 설명하던 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설명을 해주셨다. 교과서에는 <에피쿠로스 학파: 쾌락주의>라고 쓰여 있었고, 그 옆 페이지에는 <스토아학파:금욕주의>라고 대조적으로 적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쾌락’이란 단어는 입에 올리면 안 될 금기어였다. 뭔가 폐허가 된 으스스한 동네 담벼락에 써져 있을 것만 같은 불편한 단어가 윤리 교과서에 떡하니 써져 있는 것을 보고 혼자 화끈거렸다.


여학생들의 그 당혹스러운 눈빛을 느끼셨는지 선생님은 웃으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쾌락은 아닙니다."라고 찬물을 확 끼얹으셨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눠서 설명했는데 동적인 쾌락은 육체를 움직여 얻는 기쁨이고 정정적 쾌락은 마음의 평안으로부터 얻습니다. 에피쿠로스는 후자를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때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죠.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때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에피쿠로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토아보단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확실히 끌렸다. 비록 그가 주장했던 '쾌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선생님은 “에피쿠로스가 지향한 쾌락은 현재 내게 주어진 것에 집중하는 삶이었습니다. 미래를 염려하거나 내세를 걱정하지 않았죠. 현재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더 욕심을 내지 않고 사는 삶이었기에 어찌 보면 이들이 금욕주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라고도 덧붙이셨던 것 같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 그 말이 참 멋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과거에 미련을 갖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내일의 나를 끊임없이 걱정하는 불완전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에게 “현재에 집중하며 사세요.”는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방방 뜨는 소리 같다가도 내 마음에 오래 머물게 붙들어 매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지인의 큰애가 이제 곧 중학생이 된다. 아이가 과연 에피쿠로스가 지향했던 ‘쾌락’을 본디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아줌마가 된 내게 ‘쾌락’은 여전히 설레고 흥분된 그 무엇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누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마흔이 돼서야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살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으면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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