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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Feb 02. 2022

피렌체를 다시 가야 하는 이유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

무척 좋아했던 드라마가 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것인지, 유행을 받아들인 제목이었는지 전후 관계가 헷갈리는 제목의 드라마다.  드라마의 정석처럼 어여쁜 여주인공과 근사한 남주인공이 등장하는,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였다. 계약관계로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자기만의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한 남자를 고독의 방에서 꺼내 진짜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다소 진부하지만 그렇기에 또 설레는 그런 이야기.


모든 에피소드에 공감했지만,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극 중 여자 주인공의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던 여자는아이가 열 살 무렵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단다. 그런데 그때 누워서 자는 신랑을 보는데 갑자기 연애할 때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때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신랑과 헤어졌다면 평생 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겠구나 싶은 마음에 다시 함께 살 힘을 얻었다고. 그러면서 딸에게 해준 엄마의 이야기가 생생히 기억난다.


"사랑 인생 다 비슷하고 고만고만하다. 다만 지 별 주머니를 챙기는 게 중요하지. 고만고만한 인생 안에도 때에 따라 반짝반짝 떠다니는 것들이 있다. 그때마다 그걸 안 놓치고 지 별 주머니에 잘 모아둬야 된다. 그래야 나중에 힘들고 지칠 때 그 별들 하나, 둘 꺼내보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문득 내게도 잔뜩 그러모아 반짝이고 있는 별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별, 큰 별, 그리고 이제 갓 만들어지고 있는 아주 자그마한 별들까지. 그리움의 감정이 생겨날 때 그에 해당하는 별들이 유독 더 빛을 발하며 자신을 꺼내 보라고 말하곤 한다. 그때마다 그 별을 꺼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시 보면 내가 이토록 아름다운 별 하나를 갖고 있었지, 하면서 행복해진다. 그렇게 과거는 별로 만들어져 지금, 이 순간까지 반짝이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많은 별 중에서 어떤 별을 꺼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릴 적 여름 밤, 고향 마당에서 엄마가 튀겨준 송사리 튀김을 먹었던 순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하하 호호 아무 걱정 없이 수다 떨며 배가 터지도록 웃던 순간, 신랑이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줬던 그 심장 터질 듯 감격했던 순간, 그리고 12시간 진통 끝에 내 품에 안겨 울었던 딸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도 내 별 주머니에서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오늘 꺼내고 싶은 별 하나는 바로 몇 년 전 신랑과 단 둘이 다녀온 유럽 여행 때의 순간이다.



봤던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는 덕후 스타일은 못된다. 그들의 몰입이 부러워서 노력해본 적이 있지만 결국 포기한 적만 여러 번이다. 그런데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도 소위 인생 영화를 만났을 때는 그것만 몇 번을 반복하고 봤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억지로 노력을 가해서도 아닌, 그냥 보고 또 보고 싶었다. 그 영화는 에쿠니 가오리의  원작 소설로 만든, <냉정과 열정 사이>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에 빠져들게 한 것은 물론 남자 주인공도 멋졌고 그 둘의 사랑이 안타까웠기도 했지만 가장 큰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된 피렌체의 매력에 빠져서였다. 쥰세이(영화 속 남자 주인공)가 피렌체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는 모습이 멀리서부터 줌인으로 다홍색 벽들과 흙벽돌로 깔린 바닥으로 쭉 이어진다. 그곳은 꿈에라도 나올 법한 근사한 곳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저곳은 내가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 무엇보다 남녀 둘이 마지막 장면에서 재회하는 두우모 성당 꼭대기는 내 삶의 지향점처럼 늘 그곳을 동경했다. 역사를 끌어안은 거리, 중세를 그냥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곳을 꼭 가보리라 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기회가 찾아왔다. 몇 해 전, 2017년이었다.



그해의 추석 연휴가 공휴일과  겹치면서 꽤 긴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연휴 끝자락으로 연차를 쓰면 12박 여행이 가능했는데, 우리는 그때 10주년을 기념하며 단둘이 유럽여행을 떠났다. 친정엄마의 도움과 시댁 어른들의 이해, 그리고  당시 다니고 있던 회사의 배려 덕택이었다. 정확히는 8주년이었지만, 즉흥적으로 떠나기로 하면서 거액의 여행비를 지출하면서 '10주년'이란 거창한 의미를 붙여 부담감을 축소하려는 의지로 붙인 타이틀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둘이서 떠나는 여행에 설렜고, 최대한 많은 곳을 두 발로 열심히 돌아다니는 전략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의 강력한 의지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넘어가는 길목에 피렌체를 일정에 끼어넣기 했다. 로마와 이태리 남부 지역까지 둘러보려면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난 기필코 피렌체 거리를 가야만 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1박 2일로 일정에 넣었던 것이다.


피렌체 두우모 성당 앞에서




영화에서 복원을 거듭하며 과거를 응시하고 있던 도시는 실제로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소 어수선했던 기차역에서 벗어나 다홍색 벽돌로 시작되는 피렌체 도심을 걷는 순간부터 나는 아오이가 됐고, 신랑은 쥰세이가 되었다. 물론 신랑은 그 영화도 보지 않았기에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지만 난 그렇게 홀로 영화 속 세상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어디를 가든 함께였던 쥰세이와 아오이, 그들처럼 난 신랑과 손을 잡고 몸을 밀착한 채 피렌체 골목 구석구석을 정열적으로 탐하고 다녔다. 맛집을 검색하고 갔지만, 한국 사람만 득실거리는 맛집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 레스토랑에 들려서 먹었던 스테이크가 인터넷에서 맛집이라 소개했던 곳보다 훨씬 더 근사했고, 후미진 골목에서 발견한 저렴한 젤라또는 로마에서 미국 대통령이 먹었다는 유명한 젤라또보다 몇 배는 더 황홀경이었다.


피렌체 베키오 다리에서




과거에 머물고 있다는 도시에서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동사의 보고를 맛보았다. 걷는다. 본다. 느낀다. 사랑한다. 또 걷는다. 그리고 더 사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화난다.로 끝이 날 뻔했다.



피렌체 여행의 최고 기대작은 역시나 두우모 성당의 쿠폴라 정상까지 사백여 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쥰세이와 아오이가 재회를  . 작은 피렌체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와 같은 그곳을 오르는 것을 피렌체 여행의 피날레로 예정이었다. 우리 둘은  손을 마주 잡고 드디어 그곳을 갔고,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 사이로 설레며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 차례가 왔을  당당히 예약한 티켓을 보여줬다. 그런데 티켓을 검수하는 사람이 신랑이 건넨 예약 티켓을 보더니  티켓으로는 쿠폴라 전망대까지는 올라갈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잡고 있던 신랑 손을 떼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사태 파악을 했다. 유럽 여행에서 주요 관광지 예약은 신랑이 맡기로 했었다. 떠나기 전에  번이고 확인했는데 틀림없다고  부분이었다. 그런데 신랑이 예약한 것은 전망대를 올라가는 것이 포함된 티켓이 아닌, 성당 안까지만 들어가는 티켓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구매할  있는 티켓은 이미  마감이 돼서 구매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리 사정을 해봐도 사방이 여행객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우리에게만 친절을 바라기란 무리였다. 결국 우리는 포기하고 돌아서서 그곳을 나와야 했다. 쥰세이의 계단을 결국 오르지 못했다.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졌고, '사랑한다' 동사는 '화난다' 돌변해서 신랑에온갖 짜증과   말을 내뱉으며 '상처 준다' 그리고 '상처 입는다' 변하고 있었다.



“어차피 올라가도 별거 없다고 하더라.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가면 피렌체 전망은 더 잘 보인다고 하고... 그러니깐 그만 화 풀어.”라고 신랑은 설득 비슷한 애원을 했지만, 내가 좀처럼 풀어지지 않으니 본인도 화가 슬슬 올라왔던 것이다.



다시 광장으로 나오자 중앙에서 버스킹하는 거리의 연주자들이 있었다. 키보드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밴드였는데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몇몇 유럽 사람들은 흥겹게 춤을 추기도 했다. 우리 둘은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해서 그곳에 서서 물끄러미 그들을 계속 보기만 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감정이 응축된 농밀한 시간이 느껴졌다. 실망하고 화가 난 감정마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며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거리가 바로 피렌체라는 것에 새삼 다시 행복함이 밀려왔다. 슬며시 신랑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감미로운 버스킹 음악에 몸을 맞춰 소극적이지만 마음을 담아 몸을 흔들었고, 서로에게 화해의 몸짓을 취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평소 먹지도 않는 와인까지 한 병 사들고 와서 맛도 모르는 어린애들처럼 조금씩 홀짝대면서 그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면서  급 신혼모드로 빠져버렸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서 우리는 미켈란젤로 언덕 야경마저도 놓쳤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피렌체 전후로는 모든 일정이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 봐야 할 곳,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곳까지 완벽하게 엑셀 파일로 정리한 시간표대로. 그런데 피렌체에서 1박 2일만큼은 마치 도시에 홀린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 계획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마음이 동하는 대로, 그리고 몸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12일의 유럽 일정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신랑에게 피렌체에서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두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이 흘러 당시의 여행을 떠올리면, 모든 순간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역시나 가장 빛나는 별을 빚었던 순간은 바로 피렌체에서의 추억이다. 피렌체에서는 미완의 별이 만들어졌기에 다시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사실 내 별 주머니에서는 이미 가장 완벽한 모습의 별로 시시때때때로 빛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삶의 조각가는 그 별에 아주 미세한 홈 하나가 남아있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피렌체를 가야만 한다고 우기고 싶다.




함께 글을 쓰는 <인라이팅 클럽>에서 공동 주제로 매거진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란 주제로 글을 써봤습니다. 글을 짓는, 또 하나의 별을 모으는 시간을 갖게 해줌에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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