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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Feb 02. 2022

벚꽃처럼 활짝 피어난, 나의 스물 셋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

대학 2학년. 전공 결정 시기가 되자, 그녀는 애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전공을 정해버렸다. 뭐랄까, 결정적인 순간에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그녀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고나 할까. 신문방송보다는 경영이라는 전공이 앞으로 살아가는데(굳이 말하면 밥벌이를 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덜컥 전공을 정해버린 후에도 그녀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캠퍼스를 겉돌고 있었다. 전공 특성상 조모임, 발표 등이 줄 서있는데, 상경 몇 반 출신(아이고 그게 뭐라고...) 학생들은 자기네들끼리 짝을 이루어 조를 결성하고 프로젝트를 주도해나갔다.


그녀는 연애에 있어서도 이방인이었다. 상처 받기 싫지만, 사랑 받고는 싶어. 라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그녀의 연애가 누구와든 오래 지속 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교환 학생 공고를 보게 된다. 그래, 떠나자.      




그렇게 무작정,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가게 된 학교는 Seattle에 자리잡은, University of Washington(워싱턴 주립 대학교, 이하 유덥)였다. 사실 그녀는 학교에 대해서도, 시애틀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녀의 학점, 영어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 리스트 윗단에 자리해 있던 곳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학교에서 최대 규모인 12명의 학생이 파견되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그곳에서의 삶은, 즐거웠고 설레었지만 분명 외로운 순간들이 존재했다. 그녀의 룸메이트는 Amara라는 캘리포니아 출신 흑인 친구였다. 그녀에게는 늘상 달콤한 코코넛 향기가 났고, 그녀는 영어가 서툰 아시아 친구에게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녀의 남자친구 Jimmy(그래서  커플은 Jimara라고 불렸다) 덩치가 크고 순박하게 생긴 학교 풋볼 클럽 선수였는데, 덩치 답지 않게 매우 순했다. 어느 , 방에 들어갔다가 그들이 함께 침대에서  대는 것을 보고, Amara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그런 행각?!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방에서는 조금 자제해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착했던 Jimara 커플은  이후에 방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현지 친구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꽤나 높았다.      


그런 장벽이 높아질수록, 그녀와 함께 파견된 학교 친구들의 유대감은 끈끈해졌다. 초반에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 속에 한국인을 멀리하던 그녀들은, 어느 순간 동질한 그룹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서로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그녀들은 그곳에서 친구가 되었고, 가족이 되었다.      


교환 학생 제도는 교환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Pass 수준만 되면 원래 학교 학점 이수가 되었다. 4 quarters, 한국 학교 기준으로 2학기 정도의 기간이 그녀들이 유덥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들은 여행자이면서 현지인이었다. 그 묘한 경계 위에서 그녀들은 행복했다. 여행자의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현지인만이 경험하는 소속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귀국 날이 정해져 있는 그녀들은 하루도 놓을 수 없다는 듯, 시애틀의 온갖 명소를 구경다녔다. 폐공장을 개조한 공원, 시애틀의 상징인 스타벅스 1호점과 스페이스 니들, 석양이 예쁜 비치, 교외의 독일마을, 레이니어 산 등등. 때로는 교환학생 커뮤니티에서 지원해주는 차량을 타고, 때로는 버스를 타고, 때로는 렌트카를 이용해, 곳곳을 눈에 담았다. 마치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듯.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전혀, 학점을 잘 받을 필요도 없었는데 시험 기간엔 한 마음으로 Library를 지켰고, 모두가 dean’s list(우수상이라고나 할까)에 이름을 올리고야 말았다. 생활 영어도 더듬더듬 하던 그녀들이 어느 순간 영어로 리포트를 몇 장씩 써내고 학점으로 인정받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시애틀의 우기는 악명 높다. 34일 동안 비가 오다 35일째 잠깐 그치고 36일째부터 다시 비가 오는 식이다. 시애틀이 커피의 고장이 된 이유가, 커트 코베인이 자살 한 곳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악명 높은 우기를 지나, 시애틀에도 봄이 왔다. 유덥 캠퍼스 여기저기에는 아름다운 벚꽃이 피어났다. 몽우리를 품고 있던 꽃들이 따스한 날씨에 화답하듯 일제히 만개하기 시작하는 그 때의 달뜬 공기를, 그녀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그녀들 같았으니까. 이제야 꽃몽우리를 조금씩 열어 자신만의 모양으로 꽃잎을 열기 시작한 스물 셋의 그녀들을.     

출처 : UW 홈페이지
해리포터 도서관이라고도 불리는 UW Suzzallo library. 여기서 공부는 안함ㅎㅎ
학부생 도서관 odegaard library. 여기서 공부함ㅎㅎ


눈치채셨겠지만, 이것은 저의 이야기입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인라이팅 주제를 보자마자 스물 셋의 공기가 떠올랐어요. 벚꽃 향으로 가득한, 설레임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그날의 공기가. 그 때의 저는 그 어느때보다 나다웠고, 매일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행복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의 저에게도 행복이 찾아왔어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 원하는 회사에 취직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의 바닥까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그 사람과의 결실로 이쁜 아들 둘도 만났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만만한 공기와는 무게도, 향기도 다른 공기이지만 모두가 저의 행복한 순간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꼭 그 날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라비앙로즈 라는 말처럼, 아마도 제가 가장 만개했던 나날들은 그때였나봅니다. 어느날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처럼 꽃잎을 활짝 피워내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슬프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피었던 꽃잎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하나 떨어졌지만, 그 자리엔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났고 그 잎들은 쑥쑥 자라나 제 인생이라는 나무를 파릇파릇하게 해주고 있어요. 그때보다 뿌리는 더 튼튼해지고 단단해져 땅을 지탱하고 있구요.    

   

어쩌면 우리 인생도 저의 교환학생 시기처럼, 돌아갈 날이 정해진 여행일지도 몰라요. 그날이 언제일지 모를 뿐. 인생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이자, 여행자이면서 현지인이기도 하지요. 귀국날이 정해져 하루하루가 아까웠던 그날들처럼, 순간순간에 충실한 나날들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행복은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벚꽃을 마음에 품고 오늘 내 곁에 행복에 물을 주고, 도닥여 주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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