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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Aug 21. 2022

우영우의 뿌듯함, 이 감정에 관해

꽤 긴 휴가를 다녀왔다. 여름 성수기는 피해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편인데 올해는 아이들이 방학 때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큰아이가 학원에 다니면서 시간을 따로 빼는 것도 이제는 점점 여의찮다는 이유도 컸다. 단호하게 8월은 아이들 학원은 다 빼고 신나게 놀아보기로 했다. 작은 아이 친구들과 짧은 여행, 교회 가족들과 수양회, 친정 가족들과 양평 여행,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끼리 호캉스를 마무리로 긴 휴가를 보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와 남편도 각자의 쉼과 회복이 있는 시간이었으리라.


여행 중에 큰아이가 가장 기다렸던 것은 워터파크도 호텔 조식도 아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우영우는 분명 10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 집에 tv 나오지 않기에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무지한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도 아닌 선생님이 강력 추천했다면서 우영우를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방학이기도 했고, 나와 남편도 궁금하던 차에 우리는 함께 시청했다.


역시 인기와 호평을 함께 얻을 만큼 근사한 드라마였다. 중반부에는 두 손이 오그라드는 몇몇 장면들로 집중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고, 자폐인에 대한 잘못된 판타지를 심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도 있었지만 분명 드라마는 드라마로서의 내러티브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모든 캐릭터가 매력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만들기 어렵다는, 드라마 최종회가 무척이나 좋았다. 우리는 호텔에서 옹기종기 모여 숨죽이며 마지막 회를 시청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우영우가 전해준 벅찬 감동이 함께 밀려왔다. 그녀가 마지막에 느꼈던 감정,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감정이라 한참을 그 이름을 찾아 헤맸던 감정, 그 '뿌듯함'에 함께 동화되고 말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자폐인은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변호사가 된 우영우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비상한 두뇌를 돌려 법적 근거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지만, 의뢰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연인이 생겼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을 만들어간다. 그 사람을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기에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지만, 그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로 상대를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넘기 힘든 문제였다. 그런 여러 고비의 어려움들을 우영우는 이겨낸다. 그리고 변호사로서도 재계약을 이뤄내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고, 좋아하는 상대와도 헤어질 결심을 버리고 다시 잘해보기로 한다. 그런 우영우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뿌듯함'이었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뿌듯함'의 여운이 오래갔다.


"나는 언제 뿌듯함을 느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당신은 언제 느꼈어?"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남편에게 물었던 말이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아 뿌듯함의 감정을 마구 발산하던 우영우가 쉽사리 잊히지 않았고, 나는 그토록 벅찬 뿌듯함을 언제 느껴봤는지 대조적으로 떠올려 본 것이다.




우영우는 자신이 이상하고 별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뿌듯함을 느꼈던 그날 아침도, 그녀는 지하철에서 밀려온 급작스런 공포와 생경함에 소스라친다. 감정이란 것이 한번 느낀 후에 쭉 일관되게 유지되면 좋으련만, 그것의 유효기간은 지나치게 짧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 애쓰고 노력했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허무하게 짧은 것이 감정이다. 분명 가족들과 호텔에서 쉼을 누리고 호사스럽게 보내는 시간 동안 행복함을 느꼈음에도 드라마를 보고 상대적으로 나의 '뿌듯함'의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 실망하고 절망하는 감정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감정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강력하게 지배하려고 들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지배당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한 순간들이 너무도 많다.


뿌듯함이란 우영우처럼 크나큰 장애를 이겨내고 위대한 일을 성취할 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런 게 뿌듯함이라면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쉽게 누릴 수 없는 감정임이 분명하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열심히 살아내지만, 순간순간 밀려드는 허전함과 답답함들은 그러한 뿌듯함을 누리는 순간들이 적어서 그런 것이라 고 결론이 나려고 했다. 드라마 속 인물과 비교하며 내 존재가 쪼그라드는, 이토록 환경과 감정에 연약한 이가 나라는 것을 또 절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휴가를 마무리하며 이 글을 쓰는 동안뿌듯함의 순간들을 찾아내기로 한다. 불쑥 치미는 화와 짜증을 이겨내고 남편에게 친절했던 순간, 아이들을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줬던 순간, 어떤 상황에도 독서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노력, 그리고 열패감을 이겨내고 지금 글을 쓰기로 한 이 순간에도 뿌듯함이 있다. 사소하고 유약해 보이는 일상을 또 살아내고, 내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씩씩하게 딛고 있는 우리는 모두 뿌듯함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우영우가 나에게 준 선물은 격동하는 감정들 중에도 그러한 순간들을 다시 깨닫게 해 준 것이리라!


아듀, 우영우 그리고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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