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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Aug 28. 2022

기차역 너머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녀왔다. 동해에 그리운 친구가 살고 있다. 나의 20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다. 20대의 모든 정념과 열정을 한 방향을 위해 쏟아부은 적이 있다. 가끔은 참으로 미련하게 보냈던 그 시절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순수했던 나를 돌아보며 애틋함으로 보듬어주곤 한다. 나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았음을 기특해하며 그 시간의 내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리움에는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늘 함께 떠오른다. 자주 보지 못하지만 분명 우리는 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 느린 시간에 진입했을 때, 다시금 함께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지 고대하면서 말이다.


동해에 사는 친구는 해군이다. 20대의 열정을 함께 불태우며 우리는 여러 모양의 비전을 꿈꾸고 함께 나누곤 했다.  친구의 많은  중에 군인은 목록에도 없었던  같은데 이제는 어엿한 소령이 되었다. 1년간 동해에서 배를 타고 있어서 자신의 아이와도 거의 보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 중에도 친구는 언제나 씩씩했다. 그러다 배가 수리해야 해서 잠시 동해에 정박하게 됐다면서 자기를 보러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제는 나도 혼자서 여행을   있을 때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바로 떠나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년만재회했다.


오랜만에 타보는 ktx는 놀랍도록 쾌적했고 빨랐다. 서울역에서 2시간 반만 달리면 동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토록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를 그 몇 년 동안 멀다는 핑계로 보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동해역은 말끔하게 정돈된 역이었지만 시골의 감성을 아직 보듬고 있는 곳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에서 친구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앉아 있었다. 기차역 너머로 달려올 친구를 생각하며 앉아 있는 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예기치 않은 감정에 휩싸였다. 기차역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을 멍하게 지켜보면서 그들 수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이 내 안에 들락거렸다. 기쁨, 슬픔, 설렘, 미안함, 서글픔, 안도감…..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면서 그간의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촘촘하게 나누어진 파노라마들이 하나로 쭉 이어지면서 난 친구에게 그저 “잘 살았노라”라고 말할 것이었다.


기차역 너머로는 그 친구의 삶이 나보다 더 굴곡지게 이어졌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의 일상들이 수없이 많을 테지만 그 친구도 날 만나서 “잘 지냈어”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여군으로 군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부부가 다 군인으로 살면서 결혼 생활 대부분을 떨어져 지내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아이의 주 양육자가 되지 못하고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한 달에 한 번도 아이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엄마의 애틋함은 얼마나 절절할지, 평범한 일상은 포기하고 도시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에 묻은 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수없이 겪었던 어려움들을 그녀에게 제대로 토로해본 적이 없다. 그저 오랜만에 연락하면 잘 지내냐고, 힘들진 않냐고, 보고 싶다고, 기도하겠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학 시절에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며 서로 눈빛과 표정만 봐도 단숨에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 것이 괜스레 서글퍼졌다. 기차역에 앉아 그녀와 나의 거리감을 순간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얼마 후 기차역으로 친구가 왔고, 우리는 정확히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중간에 잠든 시간을 빼면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기에 그 시간 동안 밀린 이야기를 다 쏟아낼 수는 없었다. 역시나 우리는 잘 지냈다고, 감사하다고, 그저 좋다고 하는 말을 대부분 반복했다. 친구가 데리고 간 바다와 카페, 레스토랑, 계곡, 산은 우리가 살아온 모든 파노라마의 종착역이 되어주었기에 그저 좋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나는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때로는 막히고

때로는 도달하기도 하는 너의 삶은

한순간 네 안에서 돌이 되었다가

다시 별이 된다.”


-릴케, 해 질 녘-



다시 기차를 타고 내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기차역 너머, 그녀의 삶은 앞으로도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느껴질 테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지도를 꽉 잡고 갈 것임을 믿는다. 나의 세계에서 친구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것, 나의 지도를 입체적으로 잘 개척하는 것이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임을 잊지 않으리라!


나의 캡틴, 언제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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