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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17. 2022

참회의 용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좀처럼 잊고 싶은 기억들은 평생 꼬리표로 따라붙어 불쑥 힘겹게 만들 때가 있다. 허나 그 불편한 그 기억은 삶의 지표가 되어 다시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게끔 해주는 신의 은총일 수도 있다. 내게도 그런 몇몇 기억들이 있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적정한 기준을 세워준 그런 일들이 말이다.


중학교 2학년, 사춘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정처 없이 휘둘려가고 있을 때 나를 건져 준 은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많은 잔소리로 나를 선도하고자 하지 않으셨고, 그저 글을 써보라고 제안하셨다. “네 안에 용솟음치고 있는 그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글로 표현해봐”라는 비슷한 말로 나를 회유하셨다. 당시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문예반 활동을 시작했고, 글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배우며 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선생님은 내게 산문이 아닌 운문, 시를 써보라고 하셨다. 지금은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여기저기 흩어있는 단어의 윤곽들을 얼기설기 꿰어 시인 흉내를 내보려고 노력했다. 단기간에 꽤 큰 성과가 있었다. 먼저는 선생님이 크게 칭찬해주셨고 적극적으로 이런저런 대회에 출품하도록 격려하셨다. 실제로 출품한 시로 꽤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인정받기 시작하니 점점 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치솟았다.  


꽤 큰 문예 공모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대전에 살고 있었는데 시 청소년 문예 공모전에 출품해보기로 하고 다시 시구들을 조합하며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처럼 괜찮은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쯤 되면 더 근사한 시가 나와야 했는데 내가 쓴 행들은 조악하고 깊이 없는 얕은 쓰레기 더미들로 보일 뿐이었다. 마감 기한은 점점 다가왔고 나는 조급했다. 문예반 선배들과 친구들은 하나둘씩 작품을 완성했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각자의 작품을 매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결국 난 조급함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문예반 교실  귀퉁이에 오래전부터 꽂혀 있던 전국 청소년 문예상 작품집이 있었다. 역사가 오래된 문예상으로 10년도 넘은 이전 작품집부터 차례대로 책장에 꽂혀 있었다.  전에는 작품집을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날따라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를 읽었는데 내가 쓰고 싶은 시가 바로 이런 시였으면 하는 작품을 발견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감과 표현까지, 내가 이런 글을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점점 질투와 부러움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나도  정도는 충분히   있는데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버렸다. 나도   있는 글을  사람이 먼저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글을 조금 빌려서  글로 만들어도 무관하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절대  되는 일이라는 양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의 글을 베껴 쓰는 짓이 얼마나 나쁜 행동이고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인지에 대한 경고등이 울렸지만 무시하고 말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고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뇌하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 남의 창작 행위를 도둑질하는 행위는 글을 쓰는 사람의 근본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당시에는 정확히 몰랐다. 지금도 나에게 왜 힘들게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단순하게 답을 하기 어렵지만 고심 끝에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몸부림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에 나에 대한 소개로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대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씁니다.’가 내 솔직한 심정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최소한으로 가져야 하는 마음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당시 내가 범한 중차대한 잘못으로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난 그날 결국 그 작품집에 있었던 시를 베꼈다. 교묘하게 조금씩 행을 교차하고, 단어 몇 개를 바꿔치기해서 그럴듯한 나만의 시로 완성했다. 엄밀한 표절이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완전범죄였다. 그 시를 제출할 때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얼마 있지 않아 그조차 점점 무뎌지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그 시가 바로 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문예반 선생님이 소식을 먼저 듣고 우리 반에 직접 찾아오셔서 수상 소식을 전해주며 기쁨에 겨워 환하게 웃던 그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후로 내가 지금까지 잊지 못한 것은 바로 나를 믿어줬던 선생님을 속이고 기만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난 결국 끝까지 선생님께 사실대로 고하지 못했다. 차마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며 표절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 선생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마음은 달라졌다. 그 사실을 선생님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혹여나 선생님이 그것을 발견하면 어쩔까 하는 불안함이 생겼고, 그 불안함이 불편하여지자 선생님을 마주하는 시간을 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점점 글을 쓸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학교를 그곳에서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전학을 왔다.


난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이후로 수십 번 나 자신을 갉아먹는 생각과 추락을 거듭했다. 나 자신을 속이고 나를 믿어준 선생님을 기만했다는 것이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얼마나 잘못된 행동이었는지 알았던 것이다. 물론 그 뒤로도 난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을 반복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분명히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수없이 노력하며 스스로를 타이르곤 했다. 어른이 되어 한참 후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아주 뒤늦은 참회의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일이 있었냐며 허허하고 웃어넘기셨지만 내가 그간 그 일로 고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고 하니 그것으로  배운 것이 있다면 된 것이라고 해주셨다.


선생님께도 말씀드렸고, 당시 내가 베낀 시가 외부에 파급력을 선사하는 대회도 아니었지만, 브런치를 통해서도 참회의 고백을 하고 싶었다. 최근에 유명 작곡가들이 표절 시비로 두문불출하는 상황들이 종종 목격된다. 나의 문학적 감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신경숙 작가가 표절 시비로 사회적 공분과 비난을 받았던 일도 내게는 정말 큰 상처로 남아있다. 남의 창작물을 베낀 행위는 단순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그 고의성에서 그동안에 그 사람이 보여줬던 성품과 삶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키게 한다.


공인으로서 일정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도덕적, 법적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자명하다. 응당한 대가와 적법한 처벌을 받아야 함도 당연하다. 다만 나는 그들이 스스로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그 이후를 살아갈지에 더 마음이 써진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잘못과 실수는 범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이들을 속이고 기만했다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이켜서 이제는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이 타인의 가치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신 또한 어떤 절박한 계기가 생긴다면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반복된 잘못을 정당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용서는 그리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끊임없이 사람에 대한 실망을 반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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