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본 이웃들

무엇이든 물어보살

by 세리

비가 왔던 저녁, 카타르 월드컵 한국 대 가나 전이 벌어질 예정이었고 아이 둘은 각자의 할 일을 마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이상스레 읽던 책이 연속으로 읽히지 않아서 주방 근처를 허우적거리다가 축구가 시작하기 전에 헬스장에 가서 러닝을 하고 와야겠다는 마음을 들었다. 오전에 하던 운동을 점심 약속으로 하지 못해서 내내 찜찜하던 중이었다. 비가 와서 하루 운동은 너그럽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텅 하니 빈 시간을 채울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이란 생각이 들자마자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나섰다.


러닝을 할 때마다 내 청춘 시절의 추억을 소용돌이 시켜줄 90년대 댄스 음악을 가장 큰 볼륨으로 듣는다. 요즘 아이돌 노래 박자와는 뭐가 다른지는 음치인 나로서는 정확히 분석할 수 없지만, 러닝을 지속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90년대 댄스 음악에는 무한히 샘솟는다. 코요테, 터보, 벅스, DJ DOC 노래들을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눈으로 러닝머신에 달린 TV 화면을 초점 없이 보며 달리곤 한다. 러닝 중에는 리모컨으로 화면을 전환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tv전원이 켜지자 바로 나온 채널로 고정했다. 서장훈과 이수근이 보살로 분장해서 시청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란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에서 tv를 보지 않는 나는 분장한 그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헉하고 놀라고 말았다.


러닝머신에 달린 tv는 따로 이어폰을 연결하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귀로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 나오고 눈으로만 tv를 볼뿐이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들의 대화가 자막으로도 충분히 이해됐다. 이토록 친절한 예능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심히 고생하겠지만 나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었다.


내가 러닝을 하는 동안 총 3팀의 고민 상담자가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그 세 팀 고민자들은 20대 청춘들이었고, 나는 마흔이 된 아줌마였음에도 그들의 고민이 내 삶으로 갈마들었다.




첫 번째 사연은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젊은 청년 둘이었다. 전주의 국립대 공대를 다니고 있는 두 인재로 보였는데, 그중 한 명은 이번에 서울에 처음으로 방문해서 제대로 구경을 해봤다고 고백했다. 이 전에도 친구들 자취집에 온 적은 있지만 서울의 핫플은 직접 가본 적은 처음이었단다. 그래서 고민이 무엇일꼬 했는데 서울에 와보니 서울이 너무 좋아져서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잘생긴 청년의 해맑은 고백에 두 보살도 처음에는 어이없이 웃었지만 그 고백이 진지해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주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도 전주에서 다녔고 대학마저 전주에서 다니는 그 청년은 대학 졸업 후 취업은 서울에서 하고 싶다는 것은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꿈이고 도전인 것이었다. 그러나 공대를 졸업해 갈 수 있는 회사들은 지방이나 경기도뿐이라는 현실 자각을 늘 갖고 있었을 테니 서울은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먼 땅처럼 더 갈망할 터였다. 그 순수한 열망이 전심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는 한 커플이 등장했다. 취준생 남자 친구를 둔 첼로 전공자 여자 친구의 고민이었다. 아주 사소한 결정도 스스로 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남자 친구에게 물어본다는 실로 결정장애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버스를 탈지 택시를 탈지, 짜장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도 스스로 결정하기 힘들어 남자 친구에게 물어보고, 그 남자 친구는 그 모든 것에 일일이 답해주기 힘들다는 고민에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보살들은 정공법으로 남자 친구가 애정이 식은 것이라고, 계속 이렇게 가면 결국 이별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지만, 예상외로 여자는 충격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보다는 자기 진짜 고민이 또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 못하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진짜 결정장애가 최고조인 것이다. 자기 진로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순수하게 묻는 여자를 보며 고민하게 됐다. 직접 음성은 듣지 못하기에 자막과 표정으로만 전달받아 그 여백을 내 생각으로 채우는 신기한 체험이기도 했다. 자신이 잘못 선택해서 망할까 봐 두렵다는 여자의 말에 서장훈이 또 통쾌하게 물었다.


"어디 투자했니? 아님 저축을 많이 해서 잃을 돈이 있니? 그런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두렵니. 실패하면 또 어떻다고. 아직 이리도 어린데 말이야."


마지막 상담자도 대학생 청년이었다. 의대를 다니고 있다는 청년의 고민은 이제 곧 본과에 진학하면 생활비가 부족한데 학업량이 많아져서 과외도 더 할 수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예과에 다니고 있는 현재는 매일 과외를 2시간씩 하면서 한 달에 200을 벌고 있는데 현재 수준에서 과외를 더 늘리기는 어렵고, 200을 벌어서는 내년 생활비까지는 충분히 모아두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고민이었다. 부모라면 누구나 꿈꾸는 의대 진학을 자식이 했는데 생활비 지원도 못 받는 상황이라니 무슨 사연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보살도 조심스레 부모님의 사정을 물었다. 학생은 부모님도 일하고 계시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자신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의대를 졸업하고 싶다고 했다.



출처: KBS joy


식사 메뉴부터 진로 선택까지 일일이 타인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이전 상담자와는 완전히 다른 온도의 고민이었다. 의대 진학도 본인이 다시 공부해서 스스로 선택해서 들어갔고, 의대 생활도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감당하고 싶다며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그 청년의 깊은 눈빛이 애처로웠다. 거기에 있는 돈 많은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해서 tv속 청년의 무거운 짐을 당장이라고 벗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의 40분 러닝타임은 이 청년을 끝으로 마무리했다.


이 세 명의 청년들의 고민은 그들 현재의 결핍이고, 그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는 결국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한 후에 각자의 방식대로 해결할 것이다. 그들의 고민을 타인이 해결할 수 없고, 그들의 결핍을 타인이 오만하게 채워준다고 나설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이웃을 둔 우리는, 이 나라는 이들의 고민을 그저 개인 차원으로 치부해서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일까. 놀랍게도 단 세 명의 고민 속에 현 대한민국 청년들의 아픔과 고통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지역 불균형, 진로 고민, 고용 불안, 빈부 격차, 철저한 개인주의의 실태를 말이다.


청년들의 고민, 아픔, 어려움을 나는 얼마나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고민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짓밟히지 않고 그들이 밟고 있는 이 땅에서 찬란한 생명력을 뻗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쪼그라들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매거진의 이전글엄마는 3월이 새해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