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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가 되고 싶은 네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

by 세리

올해 큰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본격적인 10대로 접어든 것이다. 작년에는 코로나란 특수 상황으로 10살 진입을 어영부영 넘겼던 것 같다. 올해는 학교를 단 며칠이라도 가기 시작하면서 아이에게 새로운 어려움이 시작된 듯했다.


친구관계


여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가장 걱정됐던 부분은 '친구' 관계였다.

그것은 나의 트라우마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 courtneymcook, 출처 Unsplash


엄마 이야기 좀 들어볼래?


나는 전라북도의 면 소재지인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 그 동네는 댐이 되어 수몰이 되었으니 얼마나 작은 동네였는지 가늠이 되리라. 한 학년에 한 학급뿐인 작은 학교였고, 코 찔찔 거리며 놀던 동네 친구들이 곧 반 친구들인 곳이었다.


그 작은 우물에서 나름 똘똘한 개구리에 속했던지 나는 줄곧 1학년 때부터 반장을 하면서 친구들을 리드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이것도 현재 어른의 시각에서 그렇게 표현할 뿐, 당시 우리는 누가 반장인지는 그 누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 끝나고 밭으로 강으로 나가서 놀 생각만 했을 뿐. 매일같이 온 동네를 탐험하며 하루는 산에 오르고, 또 하루는 멀리 옆 동네 계곡까지 가서 신나게 놀고 저녁밥을 먹을 때야 주린 배를 잡고 돌아오곤 했다.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들을 우리 아이들은 고작 그림책에서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읽고 듣는 것을 볼 때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렇게 순수했던 우리들만의 리그에 초등학교 4학년, 딱 지금 큰 아이 나이가 됐을 때 도시에서 친구 하나가 전학을 왔다. 대부분 도시로 전학을 나가면 나갔지, 도시에서 그 시골로 전학을 오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이름, 미선이가 전학을 오면서 늘 함께 어울려 놀던 여자 친구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선이는 소위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갖고 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가늠할 수 없다. 처음에는 새로운 곳에서 온 아이였기에 느낀 신비감과 이질감이었을 테고, 여느 시골 아이들과 다른 총명함과 영악함에 친구들이 절로 굴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아이가 오면서 그 어떤 비밀도, 뒷말도 없었던 우리들 관계에 틈이 벌어지며 서로를 이간질하고 질투하는 감정이 비집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선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 명의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타깃은 내가 되고 말았다.


한 동네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뽈뽈뽈 걸어 다닐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었다. 개울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벗고 함께 멱을 감기도 했던, 아무것도 감출 것 없이 투명한 관계였다. 그랬던 나의 친구들은 철저히 나를 외면하고 무시했다. 미선이를 중심으로 공고한 세력이 형성됐고, 나는 홀로 힘겹게 그들에게 저항해야 했다. 당시 전학 온 미선이 눈에는 반장이었던 내가 소위 요즘 말하는 인싸의 핵심으로 보였던 것이고, 나를 제거함으로 본인이 그 중심을 꿰차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내가 그 아이에게 철저하게 굴복하고 투항했다면 나도 그 아이를 리더로 하는 그곳에 계속 속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나도 나름 이런저런 방법으로 친구들과 다시 놀고 싶어서 그 주변을 계속 기웃거렸지만 아이들은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던 것이 반복되면서 나의 자존심이 짓이겨짐을 스스로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었었다. 나 자신을 포기하면서 그 아이에게 굴복당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나는 전학을 가는 도피처를 택했다. 원래 내 고향은 아주 오래전부터 '댐'이 만들어질 예정지였고, 대다수의 동네 주민들은 가까운 도시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대전에 집을 마련해두고, 떠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참에 내가 강력하게 전학 가고 싶은 의지를 피력했고 그렇게 난 그 동네를 도망치듯 떠나왔다. 아주 훗날에 어릴 적 친구들과는 다시 재회하여 웃으면서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나름 그 문제에서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확실하게 그 일로 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 뒤로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두려웠고, 또다시 배신당할 수 있다는 걱정에 친구들에게 쉽사리 마음을 다 주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 일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 된 것은 확실하다.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면서 주변 친구들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룹으로 여러명이 함께 노는 것보다는 진짜 나의 '단짝'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를 결국은 친구로 만드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늘 반에는 '인싸' 그룹이 존재했다. 그 중심에는 그 옛적 '미선'이 같이 알 수 없는 힘과 매력을 발산하는 중추적 존재가 반드시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그 주변에 항상 붙어 다녔다. 그리고 다수의 친구들은 그 그룹에 자신들도 합류해서 함께 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어 했다.



나를 똑 닮은 나의 첫째 아이는 결코 인싸 그룹의 핵심이 되긴 힘든 아이이다. 그럼에도 그 형성된 인싸 그룹에 기웃거리며 자신도 그곳에 속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심정을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줬다. 나 스스로도 당시에는 극복을 하거나 해결을 하지 못하고 도망쳤기에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던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런데 내 아이에게는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너와 같은 고민을 했단다.


네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해줬던 것처럼, 이런저런 충고와 조언을 네게도 해줄 수 있지만, 결국은 네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임을 알려줬다. 내 어릴 적 시대와 지금은 달라서 엄마가 개입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이 스스로 깨닫고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들이 더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네 곁에 엄마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렴.
그리고 너와 같은 그 10대를 거칠게 헤치고 살아온 선배가 바로 네 옆에 있다는 것도 말이야.






커버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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