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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그리고 너희들의 웃음소리

찰나의 기록

by 세리



일주일에 딱 두 번만 학교에 가는 11살 큰아이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펜더믹이 처음 발생했을 때, 아이는 매일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편하고 좋다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밀도 있게 누렸다. 그러나 이 지리한 시간이 계속되자 이제는 학교에 가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하교 후, 아이는 갑작스레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집 현관문에서 나를 불렀다.


“엄마, 친구들이랑 집에서 놀아도 돼요? 선생님께 롤링 페이퍼 쓰기로 했는데 학교에서 마무리를 못해서 우리 집에서 하자고 했어요.”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곧 출산을 앞두고 아이들과 이른 이별을 고했다. 모두들 아쉬워서 머리를 맞대고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쓰기로 했단다. 그런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우리 집으로 오다니. 오늘은 청소도 안 하고 땡땡이치며 오전의 자유를 만끽한 날이었는데 말이다.


아이의 그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그래.. 들어와, 대신 아줌마 청소 안 했다고 욕하기 없기다!!”


“우와 감사합니다. 우리 집은 완전 더 더러운데요. 이건 진짜 깨끗한 거예요”


“하하 그래, 말이라도 고맙구나.”


다행히 미리 장을 봐 둔 간식이 있어서 귤과 과자를 예쁜 접시에 담아서 아이 방에 넣어줬다.

“엄마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을 보니 갑작스레 들이닥친 친구들을 맞아준 엄마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한가득하다. 이리 작은 걸로 감동하는 아이임에 나는 그 찰나에 또 아이에게 고맙다.



“재밌게들 놀아”






문을 닫고 나와 거실에 앉아서 음악을 틀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재즈를 선곡했다. 몇 주 전에 신랑이랑 좋은 기회로 갔던 재즈 공연에서 라이브로 처음 재즈를 들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다.



송준서 트리오 재즈 공연


재즈는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폐쇄적인 장르라고만 여겼는데, 직접 연주하는 재즈곡들은 즉석에서 선율로 만들어져 내 어딘가의 깊은 곳으로 박혔다. 차곡차곡 차오르는 음률에 몸이 먼저 떨렸고, 머리가 아닌 온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무대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이들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결코 거짓의 불순물이 섞일 수 없는 장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종종 재즈를 찾아 듣곤 한다. 지금도 재즈에 대해서 무지하다. 다만 예고 없이 텅 빈 내 시간을 꽉 채우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 때 재즈를 틀면 자연스레 그때의 감동이 공허 안에 오롯이 스며든다.



무던하던 공기에 감동을 섞은 채, 읽던 책을 펼쳐서 읽을 때의 행복함이란. 오늘은 그 재즈 선율에 방 안에서 “꺅” “까르르” 하고 연신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서 더욱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뜬금없이 살아있음에 감격하는, 그런 문학적인 순간이다. 뭐가 저리도 즐거울까.


자기들만의 게임을 하는 듯, 익숙한 목소리가 영어로 설명하고 누군가는 답을 맞힌다고 악을 쓰기도 한다. 즉석으로 저리도 즐거운 게임을 만들 수 있구나. 기특함 마저 든다.


생각은 깊지만, 내성적인 편이라 사교적이지 못할까 염려한 적도 있는데 나의 지나친 기우였음을 알게 됨에 안도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리도 친구들과 즐거운 놀이를 만들어 놀 줄 아는 아이였구나. 본인이 잘하고 좋아하는 영어를 친구들 앞에서 자연스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용기도 갖추고 있었구나. 아이는 언제 이만큼 컸을까.


나의 공간에서는 끈적한 가을 재즈가 흘러나오고, 아이의 공간에서는 십 대 소녀들의 발랄함이 차고 넘쳐 비집어 나온다.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의 조화가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난 그 경계에 앉아서 홀로 울적할 뻔했던 가을을 만끽한다. 살아있음에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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