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팬지 Feb 05. 2023

일요일 아침

실직남편과 일요일 보내기

일요일 아침, 밥을 하기 위해 부엌에 들어섰다. 토요일 메뉴 흔적이 부엌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있다. 설거지통엔 어제 먹은 라면 냄비와 그릇이 가득 담겨있고 음식물 찌꺼기에서 날벌레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싱크대 위에는 신라면 봉지와 라면스프 비닐이 뒹굴고 까만 커피가 일회용 플라스틱 컵 바닥에 고인 채 엎어져 있다. 가스렌지 위에는 며칠 묵은 김치찌개와 갈비탕 흔적이 눌러 붙어있다. 속 깊은 곳에서 잘 뭉친 빡침이 빛의 속도로 흘러나왔다. 내 뇌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어떡할까?’

‘어떡하긴. 다 던져버려.’

‘한 달 살기 어때?’

‘오호라! 그거 좋은 방법.’


스마트폰으로 ‘대부도 한 달 살기’ 검색에 들어갔다. 내 직장이 안산에 있고 바다도 볼 겸 출퇴근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 후보지로 딱 적당하다. 거실 창 앞으로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썰물 때는 까만 갯벌이 드러나는 그림이 그려졌다. 서쪽 하늘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는 얼마나 근사할까. 


‘오! 이렇게 내 로망이 실현되는 건가?’    

 

비싸다. 엽서 같은 그림이 있는 집은 100만 원이 넘고 그냥 먹고 잘 수 있는 곳도 60만 원은 든다. 이런 젠장, 고거 잠깐 살자고 그 많은 돈을 지출하는 건 아니지. 계산기가 머릿속에 들어앉더니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으로 목록이 작성된다.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갇혀 이십 년 이상 이 상태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전업주부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쉴 틈 없이 일과 가정일을 병행했다. 나이 사십을 넘기며 집안일에 소홀해지긴 했지만 언제나 집안 노동은 내 몫이었다. 끝도 없는 집안일, 이젠 그만하고 싶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밥을 하고 그 밥을 맛있게 먹는 걸 아이를 보면 배부르지 않냐고. 전혀 배부르지 않다. 나도 오늘 아침에 뭐 먹게 될까 기대하며 식탁에 수저만 놓고 싶다. 성인이 된 두 아이와 실직해 세 달가량 쉬고 있는 남편을 보면 기생충 같다. 가끔 아이들과 남편에게 ‘내 노동력으로 너희들만 편하게 사는 건 반칙’이라 투덜거린다.  

    

시금치를 무치고 어제 해 놓은 콩밥이 조금 모자라 냉동실에 있던 김치만두를 꺼내 만둣국을 끓였다. 한때 운동가를 열심히 부르며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던 남편이 어슬렁 나온다. 목이 늘어진 하얀 면티와 사각팬티 차림으로 식탁 위에 뭐가 있나 살핀다. 남편에게 민주주의는 이념이지 현실이 아니다.   


수저를 식탁에 놓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앞으로 일주일간 집 깨끗이 청소하고 집 팔게 내놔.” 

“왜?” 

"집 팔고 집 두채 구해서 따로 살자."

"왜?" 

“내 꿈이잖아. 올해가 딱 적기야.” 만둣국에 김 가루를 뿌리며 나는 말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제 몫의 밥과 만둣국을 해치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루종일 저 방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