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대설주의보가 요란했다, 새해를 맞이하고 4일 지난 아침, 눈으로 어림짐작해도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아! 망했다. 꼭 차를 끌고 출근해야 하는데 이게 뭐람. 죽기보다 책임감 없다는 소리가 더 듣기 싫어 운전대를 잡았다. 바람이 눈에 묻힌 듯 고요했고 아침 햇살도 눈 속에 푹푹 빠졌다.
‘뭐 죽기야 하겠어? 일단 움직여 보자’.
도로는 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자동차의 네 바퀴로 만들어진 두 개의 선이 불룩한 눈 언덕 사이로 길게 이어졌다. 이 차선 도로가 일 차선으로 바뀌었고 팔 차선 도로는 사 차선 도로로 변했다. 자동차 바퀴가 만들어 놓은 선이 곧 차선이었다. 태초에 말씀 대신 오늘 아침엔 바퀴 자국을 남겼다. 외제 차든 소형차든, 트럭이든 버스든 모두 거북이가 되었다. 운전대를 꽉 잡고 앞차의 뒤꽁무니에서 한참 떨어져 따라갔다. 평상시라면 회사까지 삼십 분이면 가지만 오늘은 너무 멀다. 앞차 유리창에 쌓여있던 눈이 와르르 미끄러졌다.
고가도로에 올라섰다. 편도 이차 선이지만 차들은 일 차선보다 이 차선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눈길이 익숙해져 과감하게 일 차선으로 바꾸고 속도를 조금 올렸다. 오르막 고가도로는 마치 줄지어 선 차량 떼가 우르르 하얀 풀밭을 기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속도를 내던 앞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급히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아뿔싸! 눈길 위에서 나는 무지한 초보 운전자였다. 내 차는 앞차를 향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그 순간 오래전에 내팽개친 수학 머리가 가동했다. 이 짧은 순간 내 뇌에서 작동한 뉴런을 생각하면 내 인생 몇 안 되는 뿌듯한 장면이다. 눈앞에 값비싼 고급 승용차가 보였다.
‘어떡하지, 견적이 꽤 나오겠는걸?’
내 차만 찌그러지는 방향으로 계산기를 돌렸다. 핸들을 왼쪽 중앙선 가드레일 쪽으로 틀자 차는 연석을 세게 받은 후 멈췄다. 비싼 앞차는 점점 멀어졌고 내 뒤에 따라오던 차들은 이 차선으로 비켜 갔다. 휴! 다행이다. 아무 일 없다. 차도 멀쩡하다.
비상등을 켜고 후진했다. 헛도는 바퀴 소리만 들릴 뿐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상태를 살펴보니 뒷바퀴는 모두 눈더미에 갇혔고 왼쪽 앞바퀴는 연석 위에 올라서 있었다. 다시 운전석에 앉아 가속 페달을 밟았으나 여전히 눈 속에서 헛바퀴만 돌았다. 보험사 비상 출동은 마비 상태였고 아침 시간은 초 단위로 느리게 흘러갔다. 방법이 없다. 안 되겠다. 오늘로써 내 무사고 책임감을 끝내야 했다.
그때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내 차 뒤에 멈추어 섰다. 그 차 앞문이 열리더니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가 내렸다. 순간 난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았고 하얀 후광을 짊어진 그가 내 앞에 섰다. 한 손에 삽을 든 그는 내 차 뒷바퀴 주변의 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정우성 등짝보다 더 멋있었고 난 그의 옆에서 사랑을 보냈다. 그는 고귀한 땀방울을 뿌리며 거룩한 삽질을 이어갔다. 이윽고 뒷바퀴가 눈을 벗어나자 그 남자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다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저기요.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밥이라도 사 드리고 싶은데...”
겨우 생각난 것이 밥이었다. 그 때 내 마음은 왕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들고 무릎을 꿇고 싶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끝내 간절한 내 눈빛을 거절하고 영원히 사라졌다.
천사는 있었다. 누군가 천사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천사의 모습은 삽을 든 검은 실루엣으로 후광이 비치는 형상이다. 그 겨울 그 남자도 기다란 차의 행렬에 마음이 바빴을 거다. 그런데도 어려움에 빠진 누군가를 지나치지 못하고 구원했다. 아마 그는 나를 도와주었던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거다. 그리고 어디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천사가 되었겠지. 나는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는 내가 더 친절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꽁꽁 숨겨져 있던 내 날개가 살며시 돋아나도록 그는 삽을 들고 그 겨울 내 앞에 섰다. 혹시 밥이 아니라 술이었으면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