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편의점과 카페 사이 골목길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이 길이 맞아?” 나는 입에서 하얀 김을 가쁘게 내뱉으며 이경에게 물었다.
“맞는 거 같아. 나만 따라와.” 이경은 스마트폰 지도앱을 한 번 쳐다본 후 눈으로 골목길을 더듬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엔 높은 빌딩이 가득했는데 조금 벗어난 뒷골목은 오래된 단층 주택들로 빼곡했다.
“엄마가 파란색 대문이라 그랬어. 간판은 없고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래. 잘 지켜보면서 가.”
우리는 이경 엄마가 새해마다 가서 점을 본다는 ‘댕기 동자’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넌 뭐가 궁금해?” 이경이 내게 물었다.
“인턴 계약이 연장될지, 정직원은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묻고 싶어. 너는?”
“나도 그래. 하고 싶은 건 좀 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게 맞는지 헷갈려.”
둘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잠시 웃었다. 웃을 일은 아닌데 웃지 않으면 자신들의 인생이 너무 심각해질 거 같아서.
나와 이경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일 년 전에 인턴으로 함께 입사했다. 나이가 같다는 걸 알게 된 후 우리는 금새 오랜 친구처럼 친해졌다. 회사와 재계약은 두 달을 남겨두고 있었고, 재계약 여부로 많은 것이 달라져 버릴 것이다. 매달 내는 주택청약예금과 원룸 월세, 옷은 어떻게 살지. 어제도 SNS를 보며 인플루언서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찜했다. 한 달 고정지출과 취준생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 골목이 더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이경이 회색 콘크리트 벽돌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도를 쳐다보더니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맞은 편에 파란 대문이 보였고 지도앱 위에 화살표도 도착했음을 나타냈다.
“드디어 찾았다.” 이경은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나는 머뭇머뭇 대문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파란 대문 한 쪽이 열렸다. 남색 츄리닝 바지에 하얀 맨투맨을 입은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오대오 가르마가 깔끔하게 머리를 가르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두피에 딱 달라붙어 뒤통수에 묶여있는 모습이 딱 댕기 동자였다.
“예약하신 김이경님인가요?” 댕기 동자가 물었다.
“아. 네.” 이경은 대답하고 지연과 함께 길게 땋은 머리를 등 뒤에 늘어뜨린 남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동자치고는 나이가 좀 있는걸?” 우리는 낮게 큭큭 거렸다.
작은 거실에 탁자 하나가 묵직하게 놓여있었고 한문으로 표지가 쓰여진 누런 책 한 권이 그 위에 놓여있었다. 점서인가 짐작하며 나와 이경은 댕기 동자 맞은편 방석에 앉았다. 책꽂이가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한문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잎을 몇 개 매단 화분이 하나 보였고 바닥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누가 먼저 보시겠습니까?”
댕기 동자의 말에 나와 이경은 서로 눈짓을 교환 후 내가 먼저 보기로 했다. 댕기 동자는 깨끗한 A4용지를 꺼내더니 내가 불러준 생년월일시를 볼펜으로 휘갈겨 썼다. 그리고 덧셈을 풀 듯 숫자들을 써내려 가더니 이윽고 나를 쳐다봤다.
“뭐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다니는 회사 계약 기간이 곧 끝나거든요. 계속 다니게 될까요? 아니면 짤릴까요?”
댕기 동자는 다시 A4용지에 숫자 몇 개를 쓰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연씨는 공부하면 좋은 사주입니다. 지금 회사 다니면서 계속 공부하세요. 특히 입으로 하는 일이 좋다고 사주에 나오네요.”
나는 긴장이 좀 풀렸고 그의 말이 희망적으로 들렸다.
“그래요? 안 그래도 지금 심리학 공부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심리학 관련 책을 읽고 있어요. 내년 봄엔 대학원에 갈까도 생각 중이구요.”
“잘하고 계십니다. 심리상담도 입으로 하는 일이니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회사 생활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지연씨는 인생 초반에는 고생 좀 하지만 사십쯤부터 일이 잘 풀리는 사주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다른 사람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시고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사세요. 그런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 운동도 하면서 건강에 신경쓰세요.”
“아! 네. 그럼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다 잘된단 말씀이시죠?”
잘하고 있다는 댕기 동자의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후 이경의 상담이 이어졌고 이경도 곧 표정이 밝아졌다. 상담을 모두 마친 후 우리는 댕기 동자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저....짜장면 먹고 갈래요?”
엥? 댕기 동자 말에 어리둥절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는데,
“저녁 먹을 시간인데 같이 먹죠. 제가 살게요.”
나는 이것저것 더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이경에게 먹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경도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은 후라 만족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재계약에 대한 오십일프로의 희망을 가지고 회사에 열심히 출근했다.
“뭐라고? 댕기 동자한테 문자가 왔다고?”
“응. 그렇다니까. 나보고 언제 같이 밥 먹재.” 이경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좋은 남자 언제 만나냐고 물어봤잖아. 그때 그 댕기 동자가 곧 귀인이 나타날 거라고 하더니....참...”
“와! 미친” 나는 씹고 있던 돈가스가 튀어 나가지 못하게 입에 힘을 주어야 했다.
“웃지마.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이젠 별 이상한 사람이 막 꼬이잖아.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웃었잖아. 남자는 웃으면 결혼까지 꿈꾼 대잖아.”
“짜장면, 탕수육도 작전이었던 거지.” 이경은 씩씩거렸다.
그런데 잠시뒤 골똘히 생각하던 이경이 싱글거리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 그가 왜 내게 전화 했을까를.” 이경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이건 굉장히 좋은 징조라고. 댕기 동자는 내가 아주 크게 될 사람이란걸 안 거지. 내가 왕이 될 사주라 나랑 엮이고 싶은 거라구.”
나는 이경을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경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