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마지막 날, 뭔가 종결을 만들어야 하는 날. 바느질할 때 실 끝에 매듭을 만들면서 시작하고 매듭을 지어 끝내는 것처럼 올해 2023년을 잘 매듭지어야 새로운 매듭을 시작할 수 있다. 나무가 나이테를 만드는 일은 계절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에 뿌리는 햇살, 즉 기온 차이로 성장과 멈춤을 한다. 날씨는 이상기온으로 춥거나 더울 수 있지만 태양은 계절에 따라 빛이 머무르는 시간이 변화하므로 낮과 밤의 길이가 다르다. 나무는 가을에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아채고 월동 준비에 들어간다. 그들은 빙하기나 간빙기인 현재, 자신들의 시계를 따르며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의 시간으로서 마지막 날인 오늘은 특별하다.
소나무에게 일 년 살이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솔방울 속에 씨를 많이 만들어 퍼뜨리는 일일 것이다. 씨앗이 떨어져 발아하는 일은 모든 씨앗 중에 오퍼센트 가량이며 어린나무가 일 년을 살 수 있는 확률도 그 중에 오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그 작은 확률을 위해 엄마 소나무는 열심히 광합성작용을 하고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영양분으로 씨앗을 만든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춘다. 마지막 12월은 나도 겨울을 나고 있는 나무처럼 숨 고르기를 한다. 한 해를 시작하며 계획했던 일을 점검하고 그동안 12개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더듬어 본다. 내가 잘한 일, 부끄러웠던 일, 하고 싶었던 것, 새로 얻은 깨달음 등을 정리한다.
2023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씨앗은 ‘경험은 책보다 강하다.’이다. 그동안 책 읽기에 너무 몰입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여행보다 독서를 더 우선순위에 둔 측면이 있었다. 물론 책에서 많은 값진 것을 얻었다. 내가 머무르는 틀이 더 확장되었고 틀에서 뻗어난 갈래 길이 늘어났다. 각각의 갈래 길은 나무 뿌리처럼 좀 더 촘촘하게 갈라지며 이곳 저곳을 탐색한다. 흡수하는 영양소 종류가 늘었고 줄기가 더 단단해졌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고 여행하며 얻는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책은 머리를 통해 경험하고 마음에서 일부 영양분을 빨아들이지만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얻는 배움은 온 감각을 사용해 직접적으로 소화한다. 여행 또한 어느 한 장소에 나를 던져 넣고 그 공간이 내뿜는 온갖 질료로 나를 다듬는 일이다.
‘경험은 책보다 강하다’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던 영화가 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만든 1998년 영화 <굿 윌 헌팅>이다. 주인공 윌은 책을 통해 과학, 문학, 전쟁, 미술, 사람에 대해서 뭐든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천재다. 그 앞에 앞으로 윌의 진정한 스승이 될 숀이 나타났고 그는 윌에게 말한다. 고아로 자란 너를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고 알 수는 없다고. 너 자신에 대해 말해야 너를 알 수 있다고. 그 후 윌은 숀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방어기제를 하나씩 풀면서 아픔을 치료하고 너머로 나아간다. 자신을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는 경험을 통해 윌은 삶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얻는다.
내일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한다. 올해의 씨앗을 잘 틔워 더 튼튼한 아기 나무를 키울 것이다. 시간은 계속 이어지며 우리는 더 넓고 깊게 뿌리를 뻗어갈 것이다. 잠시 서서 내 생각과 가치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지나는 발자국마다 씨앗을 심을 거다. 많은 씨앗은 소나무 씨앗처럼 사라지겠지만 운 좋은 씨앗은 내 길 어디에선가 잘 자라서 나와 연결될 것이다. 빛을 받고 더 풍성한 나무가 될, 우리 모두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