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혀둔 슬픔을 덜어내고
그리움을 회상하는 글들을 쓰게 되면서 나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나를 뒤덮고 있는 무겁고 우중충한 검은 구름이 문자 사이사이로 증발되어
시야가 트여 밝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되살아 난 것이다
오랜만에 어릴 적 천진하게 친구들과 뛰놀며 행복했던 기분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밝고 재미있었던 기억의 작은 조각부터 소환해 보려 한다.
중3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모두들 들떠고 신나 있었다
이 기분 연장을 위해 마음이 맞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그 당시 시내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2차 상영만을 위주로 하는 '태양극장'에서 오픈 기념으로 한번 더 할인하는 영화(제목 :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리다! 주연 : 신성일 박노식 배우님 주연)를 보러 갔다
중3인 우리 주머니 사정을 알아주는 좋은 곳이었다
엄연히 학생의 영화 상영은 엄격하게 금지된 시절이었는데, 왜 이런 객기를 부렸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극장 지킴이는 별다른 저지 없이 우리를 입장시켜 주셨다
심지어 학교를 알 수 있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까진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흘러가는 중 알았다
대여섯 명이 함께 떼를 지어 교복을 입고 연하늘색 학교 가방까지 들고 몹시 눈에 띄기 쉽게, 한 줄로 나란히 앉아 평화롭게 영화를 관람했다
고아원 시절 동생을 키우기 위해 범죄에 손을 댄 형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력 범죄자가 되고, 동생은 정반대의 인생을 살게 된다.
검사가 된 동생이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사랑하는 형을 울면서 검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내용이었다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에 심취되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극장문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어떤 아저씨가
왼 가슴 쪽 주머니 위에 붙여 있던 내 명찰을 가장 먼저 확 뜯은 후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의 명찰도 아주 빠르고 요령 있게 뜯어버렸는데,
너무 순식간이라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망했다!
섬찟한 기운이 우리에게 엄습했다
잘못되면 '정학 처분'!
아저씨의 정체는 근처에 있는 다른 학교 선생님!
그 시절 지역에서 나름 명문 중학교라 알려진 곳에 다니던 학생들이 영화관에서 보이다니, 구미 당기는 먹이였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해서 조금 그렇지만, 그 아저씨가 재직 중인 학교는 우리 학교와 성적 차이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학생의 본분을 저버린 모범생들이라니!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자부심에 금을 내기 딱 맞는 사건이 아닌가!
(그 당시에는 그런 것으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두던 시절이라 저 설명을 써야 했음을 이해 바란다)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 궁금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가 정학을 당하거나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자부심을 망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남우 김희라 씨'를 닮은 아랫입술이 도톰한 한 친구가 명찰을 거머쥔 아저씨(다른 학교 선생님)의 손을 펼쳐 되돌려 받는 데 성공했다.
뜯긴 명찰을 되찾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저씨~~~!!!!'라고 소리치며 떠나갈 듯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한참을 선생님과 사투를 벌인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영화 상영을 막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극장 앞에서 어린 여학생이 큰 소리로 울고 있자
낭패스러움을 느낀 선생님은 꽉 움켜쥐었던 손을 슬쩍 펴 버렸고,
친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명찰을 거머쥐었다.
우리(친구들과 학교)의 영웅이 된 그 친구는 그 자리를 피해 집으로 재빠르게 뛰어 돌아갔고, 모든 걸 실패하여 창피했을 선생님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도 상황파악이 덜 된
우리들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친구가 자기 명찰만 가져간 줄 알았고, 우리의 처한 상황에 당황하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영악스럽게 그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증거인멸을 했다.
기념품으로 받은 제법 고급스러운 부채를 아깝지만 근처 개울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끔찍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과 교무주임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댁으로 찾아갔다
제법 먼 거리를 힘든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을 다 함께 걸어 다녔다
이실직고를 하는 우리들에게 공감을 해 주시며 걱정해 주시는 담임 선생님의 표정에서 안도감을 얻으며, 약간은 편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선 명문이었던 우리 학교를 흠집 낼 기회를 놓치려 않으려 한 의도인지
불량학생은 벌을 주어야만 한다는 신념 때문이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선생님은
당연하게 우리 학교 측에 보고 또는 경고를 보내셨고,
무시해서는 안 되는 다른 학교의 경고에 호응하기 위해 우리 학교에서는 교무회의까지 여셨다
며칠간 우리는 교무실 앞에서 아주 짧게 무릎을 꿇기도 하고 형식적인 반성문도 썼다
교무실을 오가는 선생님들이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마다 우리 이름을 장난스레 호명하며
예사롭지 않은, 약간은 멜로물 같은 영화제목을 발음하고선 웃으며 심하지 않은 혼을 내셨다
"뭐?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리다아~? "
사실 내용은 지극히 건전해서 다행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명찰이란 물증도 사라졌고,
나를 포함하여 걸린 학생 대부분이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난 근처 대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 시 쟁탈배 행사로 하는 연극이나 무용공연 등을 혼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잘 보러 다니는 문화소녀였던 것 같다
동네에서 가끔 열리는 뭔가 팔기 위해서 하는 서커스공연도 꼭 보았다
과거의 명랑함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잊고 있던 혼자서 하는 예술과의 데이트를 다시 시작하며,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야겠다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인생이여 안녕!
여기 다시 여중생 가슴에 비가 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