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브루타 수업에 가니 생각지도 못한 그림 그리기 수업이 진행됐다. 하얀 도화지와 형형색색의 마카펜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서 감정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라고 했다. 예상 밖의 수업 내용에 당황했다. 평소에 그림을 그리지도 않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긴 해야겠으니,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과 거기에 따른 감정을 색으로 표현했다. 우리 가족은 조만간 이사를 가게 되는데, 그곳의 풍경을 떠올리니 녹색 풀이 무성한 신선한 장면과 희망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서 일단 연두색으로 도화지 정 가운데를 슥슥 칠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순서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감정에 이끌려 자유롭게 손이 움직였던 것 같다. 좋은 생각을 할 때는 녹색과 파란색을 주로 썼다. 내가 저 두 색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쩐지 저 색들이 주는 이미지가 좋다. 하지만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도 파란색을 썼다. 확실히 파란색은 밝고 희망적이고 신뢰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울한 게 이중적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혼재되어 있다. 나는 분명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자극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그 주변으로 다시 어두운 감정이 덮인다. 선명한 상흔 같은 아픈 감정들을 느낀다. 그 아픔은 너무 진해서 다른 감정으로 아무리 덮어도, 덮이지 않는다. 은은하게 예쁜 색들은 다른 어두운 색에 순식간에 잠식당한다. 나는 후회한다. 그 예쁜 색들 위로 이 어두운 색을 칠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나는 그 순간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수많은 색들이 모여서 어느새 거대한 원형을 이룬다. 처음부터 이런 이미지를 원했던 것일까.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됐다. 계획이 없었다. 그리면서 계속 생각했다. 시작은 했는데 끝은 언제 내야 할까. 내가 과연 이 그림을 수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 그리고 싶을 때까지 계속 그리자. 옆에서 선생님이 다 그렸냐고 질문하시기에, 대충 다 그린 것 같다고 대답하고는 그대로 멈췄다. 이쯤에서 끝내도 되겠다. 혼자 내버려 뒀다면 끝도 없이 커졌을 감정 덩어리들이 외부자극으로 이렇게 중단되는구나.
이 정도 했으면 됐다. 횡설수설하지만, 감정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바가 딱 이런 것 같다. 복잡하게 얽혀있고,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 그걸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완성된 그림은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 순간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미련은 없다. 그림을 그리고 그 뒤로 글을 이어서 썼다. 드디어 아홉 편의 글을 완성했다. 그동안 쓴 글들을 쭉 읽어봤다. 내 글 속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있다.
고립감, 죄책감, 자기 합리화, 불안, 신뢰, 안도감, 경계심, 조심스러움, 공포, 괴로움, 회한, 반성, 희망, 결심, 혼란, 갈등, 외로움, 공감, 고마움, 허망함, 자기 성찰, 무기력함, 공허함, 갈망, 자기 위로, 격려, 변화에 대한 의지, 재미, 몰입, 기쁨, 자기 이해, 다짐, 탐구심, 설렘, 호기심, 긴장, 감사, 만족감, 질문, 불편함, 해방감, 내면의 복잡함, 결단, 실천 의지, 바람, 고민, 아픔, 깨달음, 책임감, 현실 인식까지.
이렇게 내가 그동안 써온 글을 다시 읽으며 찾아낸 감정만 해도 자그마치 50가지나 된다. 나는 내가 그동안 감정에 대해 무감각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게 뭔지 몰라서 그냥 지나쳐왔던 것 같다. 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감정들이, 글을 통해 하나씩 이름 붙여졌다. 불편한 감정도 있었고, 꺼내기 꺼려지는 기억도 있었지만, 그조차 내 일부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글을 쓰다가 울컥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으며,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고, 지금을 성찰하기도 했으며, 앞으로를 그려보기도 했다. 나는 감정을 쓴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 나를 써온 것 같다.
감정은 흐르고, 변하고, 겹치고, 때로는 설명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글로 쓰면 그 모양이 조금은 또렷해진다. 내가 그린 그 커다란 감정 덩어리처럼, 계획 없이 시작했지만 결국 나다운 무늬가 생겨났다. 이제 아홉 개의 감정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까지 합치면 열 편이다. 처음에는 내가 글을 모두 완성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는데 끝까지 해내서 뿌듯하다. 거창한 결론은 없어도 괜찮다. 그냥,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고 써보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