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묘 - 첫 주

진짜 시작

by 싹둑

첫날이니 학원 실장님과 짧게 대화를 하고 (학원 내 이성 교제는 금지며 그림은 학원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는 등 짧은 안내사항이 적힌 종이에 사인을 하였다) 안내받은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뒤쪽에는 나처럼 그날 처음 온 것 같은 애들 몇 명이 앉아있었다. 나와 동갑으로 보이는 여자애들 3명 정도. 아니나 다를까 곧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 HB, 2B, 4B를 주시고는 연필을 깎는 방법부터 보여주셨다.


네모난 호일 통을 밑에 받치고 커터칼로 연필심이 길게 드러나도록 깎은 뒤 뾰족하게 다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선생님이 하니 그렇게 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들 차례였다. 누가 초보 아니랄까 봐 내 온 정성을 다해 깎는데도 연필심이 몇 번이나 부러졌고, 표면은 까칠했고, 깎았는데도 끝이 뭉툭했으며 심지어 한 자루는 모르고 반대로 깎아 '2B'라는 문자 중 'B'를 조금 깎아먹었다. 선생님도 보고 어이가 없으셨는지 웃으셨다.


앉아서 먼저 명도 연습부터 했다. 칸을 나눠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점점 빼곡하게 선을 쌓는 연습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를 모아두고 선생님께서 시범을 보여주셨다. 그 뒤엔 각자 자리에 앉아 시작하였는데,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으려니 팔이 빠지는 것 같았다. 눈이 아팠다. 고개를 들자 사물이 두 개로 흐릿하게 보였다. 안경을 썼는데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확신이 없었다. 지겨워서 얼른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기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지적질을 하며 완성도를 최대한 높이려 노력했다. 책상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시던 이름 모를 선생님 몇 분께서 내 소묘를 보고 조언을 해주셨다. 너무 옅다든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든가.


몇 시간이나 갈아넣었을까. 몇 시간을 꼬박 투자해 명도 10단계 종이를 끝냈다. 야호!


신남도 잠시, 이번엔 정말 본격적인 소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정육면체 소묘. 선생님께서 자료를 주셨다. 그 A4 용지 속엔 깔끔한 정육면체 소묘가 담겨 있었다. 선생님께서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스케치를 하고 톤을 깔되 윗면은 제일 밝게, 중간면은 중간 명도 정도로, 빛을 제일 못 받는 여기는 3번면이니 제일 어둡게 하라고. 반사광이란 게 존재하니 밑 부분은 다 칠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잊지 않으셨다.


어설픈 솜씨로 더듬더듬 스케치를 했다. 투시도 안 배운 상태였지만 자료 속 보이는 투시를 그대로 맞추려고 생고생을 했다는 건 모두가 예상할 수 있을 테니 두말하지 않겠다. 선이 어찌나 똑바로 안 그어지는지. 그래도 면과 면 사이 살짝 각진 부분을 표현하고 디테일도 조금 살리는 건 기본이니 꼼꼼히 그려주고. 톤을 어느 정도 깔자 벌써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그리는 내내 느낀 거지만 학원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친구들끼리도 수업 중 잡담은 일절 하지 않는지 선생님과 수강생의 대화만 들릴 뿐 나머지는 조용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들도 가끔 다른 곳으로 가시면 적막 속 들리는 소리라고는 붓 씻는 소리. 선생님들의 신발 소리. 그리고 종이에 문대는 나의 연필 소리.


첫날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하루 더 가야 했다. 일주일에 이틀, 대신 일주일에 총 14시간이었나 17시간이었나 가는 걸로 정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둘째 날에도 학원에 갔다. 원기둥 스케치를 뜨고 또 소묘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게 완성한 것 같아 뿌듯했다. 물론 체력적으로는 힘들었다. 그래도 완성본을 보니 뿌듯했다. 선생님께서 중간중간에 도와주긴 하셨지만 이젠 진짜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나 이제 소묘하는구나. 곧 물감도 쓰겠구나.


아직 집에 가기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구 소묘까지 들어갔다. 어둠부터 찍었다. 또 열심히 뼈 빠지게 톤을 엉성히 쌓고 나니 벌써 집에 갈 시간. 시간이 묘하게 가는 것 같으면서도 가지 않아서 막판에는 힘들었다. 일어나고파 근질거리는 엉덩이를 억누르느라고.


첫 주. 수고했다는 의미로 나 자신에게 야식을 바쳤다. 달달한 티라미수는 최고였다.


학원에 처음 간 주에 알게 된 것:

-HB, 2B, 4B 순으로 단단하다.

-4B는 어두운 데 사용.

-HB를 깔면 4B가 잘 안 올라간다.

-연필심을 날카롭게 다듬는 방법 2가지. 심을 칼날에 갈거나, 칼날로 탁탁 치면서 밀어내는 방식으로 깎거나.

-소묘는 어두운 부분을 먼저 찍는 게 좋다.

-연필은 항상 뾰족하게.

-반사광 잊지 말기.

-선생님이 여러 분 계시면 말이 다 다를 수 있다. 연필 각도라든가, 톤을 깔 위치라든가... 눈치껏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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