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 괴로움 아닌 즐거움 되도록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전령사가 찾아오길 기다린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뭔가 가슴 설레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꿈꾸기도 한다. ‘화양연화’의 뜻처럼 어쩌면 지금이 김민식 PD에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2023년 새해 찬바람 불던 어느 늦은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김민식 PD를 만났다.
“저는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카페에 마주앉은 김민식 PD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된 것이, 그 시절의 싸움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김민식 PD의 직업은, 말 그대로 PD(방송프로그램의 제작자 겸 연출자)다. 지금은 방송국 PD직에서 퇴직했지만, 그의 오랜 직업이기도 했고, 지금도 스스로의 인생을 프로듀싱(제작)하기에 여전히 PD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는 1996년 MBC(문화방송) PD로 입사 후, 인기 시트콤 <뉴논스톱>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을 받았다. 10년간 예능 PD로 활동한 후, <내조의 여왕> 등 인기 드라마도 만들었다.
방송국 PD에서 ‘1인 창작자’로 변신
김민식 PD는 입사 후 정년퇴직까지 평생을 회사에 소속돼 PD로 살 줄 알았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인생은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위에 언급한 ‘그 시절의 싸움’ 덕분이다. 2012년 그가 방송국 노조의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회사에 미운털이 박힌 그는 정직 6개월, PD 업무와는 동떨어진 송출실 발령 등 갑작스런 폭풍우에 휘말리듯, PD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일을 계기로, 저는 회사에서 어떤 일을 줬을 때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깨달았어요. 그 때부터 매일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어요. 독서일기와 여행기를 많이 올렸습니다.”
그는 바쁜 PD 생활 중에도 1년에 200권씩 책을 읽어나갔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가 2017년,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서 ‘영어 학습 노하우’를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꽤 많은 인세도 벌었다. 동료 PD들이 책을 어떻게 내는지 궁금해 했고, 이에 대한 답으로 쓴 책이 <매일 아침 써봤니?>이다. 그리고 해마다 떠난 해외여행 경험을 담아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를 펴냈다.
삶을 관통하는 3가지, 독서, 글쓰기, 여행
“오래 전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행 다니는 삶을 살아왔으니, 앞으로 이것을 직업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 방송국 구조조정 때 명예퇴직을 선택했습니다.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 시절에 얻은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40대, 50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노후에도 끝까지 갈 직업을 생각하다가 ‘1인 창작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현재 작가로, 또 강연자로 인생 이모작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글쓰기가 매우 좋은 취미”라고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또한 글을 다 쓰고 나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는 것. 그래서 그는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지’ 뚜렷이 알게 되었고 빠른 결단을 내렸다. 그가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글을 쓰면서 얻은 수확이다. 어느 덧 퇴직 후 2년이 훌쩍 지났다. 그는 지금의 삶이 더없이 좋고 행복하다고 한다.
저서 ‘외로움 수업’ 출간
2023년 새해에 그의 저서 <외로움 수업>이 나왔다. 이 책에는 2020년 12월에 퇴직한 이후, 코로나가 번창하던 2년 동안 철저하게 고독하고 외로웠던 심정과, 다시 공부하고 깨달은 이야기가 덤덤히 담겨있다. 저서 제목 <외로움 수업>에는 ‘온전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있다.
“저는 당시에 더할 수 없이 외로웠습니다. 고독과 시련을 혹독하게 견딘 후에 문득,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외로움’을 달리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겠다고요, 외로움이 찾아오면, 오히려 반갑다고 해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느라 정작 나를 잊고 살았는데, ‘외로운 시간’은 나를 온전히 바라보게 합니다. 외로움이 ‘너 자신을 돌봐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움이 괴로움이 아닌 즐거움이 되도록, 이를 통해 내 자신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가 나를 직접 챙기는 것이 ‘복지’
김민식 PD는 “흔히 복지라고 하면, 누가 나를 챙겨주는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복지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주로 국가나 사회, 회사에서 사회 구성원과 사원들에게 복지 정책을 펴거나 복지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복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직접 챙기는 것입니다. 국가나 조직에서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복지를 먼저 챙겨주는 것이죠. 왜 남들이 내 복지를 챙겨주기를 기다리나요? 내가 바라는 복지를, 내 스스로에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가 아닐까요?”
흔히들 노후에 돈이 넉넉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반대로 돈이 없다면 불행한 것인가? 김민식 PD는 주변을 둘러보면 돈과 상관없이 즐길 것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저는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 빌려 읽고, 좋아하는 양재천을 걷고 청계산에 오르며 사계절을 즐기고 건강도 다지고, 이 모든 것은 돈 한 푼 들지 않는 즐거운 놀이입니다. 왜 꼭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선물 주어지듯이 왜 복지를 마냥 기다리나요? 각자가 영위하는 행복도, 그리고 복지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김민식 PD는 “돈이라는 물질적 조건과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잘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나는 행복한지,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 시간 남짓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뜨거운 용기가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