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외갓집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외할머니..
외가(外家) 한자로는 바깥 집의 의미이지만 아빠의 부모님이신 할머니, 할아버지 댁 보다 훨씬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유년시절 나에게도 외가는 그런 곳이었다.
가면 언제나 신나는 곳.
좀 무서운 할아버지도 계시지만 자상한 할머니가 반겨주시는 곳.
입대한 큰삼촌 냄새가 나는 방이 있는 곳.
언제나 싱글싱글한 얼굴로 잘 놀아주던 작은 삼촌이 있는 곳.
나도 결혼을 하고 보니 왜 그런 것인지 알게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곳은 엄마가 결혼을 통해서 가정을 꾸리기 전에 딸로서 살던 엄마의 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려자를 만나 새롭게 만든 가정보다 내 엄마, 아빠가 계신 그곳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전업주부였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애가 넷이나 있던 엄마는 우리가 방학을 맞이하면 외가에 1-2주씩 머물게 했다.
외갓집은 양수장을 했는데 꽤 큰 시골집이었고 입구에는 커다란 양수장 공장과 물을 가둬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시골 부잣집의 딸이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체구가 자그마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하게 생긴 고운 분이셨다.
그 당시 여자들 대비해서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세파에 찌들어 목소리마저 커진 엄마보다 훨씬 고운 모습의 할머니.
목소리도 자근자근했다.
할머니는 고운 들꽃 같은 분이셨다.
할머니가 차려오시는 밥상은 늘 맛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고기반찬, 생선 반찬, 정갈한 전, 산적들 그리고 갖가지 나물들까지.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서나 혹은 친할머니 집에 가서는 얻어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내오셨다.
그렇지만 보기보다 음식들이 맛있지는 않았는데..
주방일에 숙련된 주부의 그것이라기보다 부유한 사모님이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들어내 오는 명절 음식 같은 느낌이 있었다.
명절의 친척집 순례는 주로 외갓집에서 마무리되었었는데, 명절 연휴가 끝나가는 시원섭섭한 느낌과 함께
외할머니 집이 주는 안락함은 명절 행사의 가장 알맞은 마무리였던 것 같다.
(엄마로부터 받아온 앨범에 새 할머니의 사진은 없었다...)
어렸을 때 엄마를 따라 부산에 있는 묘지를 가끔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교통편이 좋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거의 하루를 다 쓰는 행사였었는데, 아침부터 엄마가 이것저것 음식을 챙기면 소풍날처럼 덩달아 마음이 들떴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범어사역'이라는 지하철역이 생겼지만 내가 미취학 어린이였을 때는 버스를 2,3번 갈아타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등산객과 절을 찾는 신도들도 많이 가는 곳에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찾아보니 할머니 산소가 있던 곳은 '영락공원'이라는 곳인 것 같다.
가파른 길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엄마는 항상 조화를 샀다.
빨강 노랑 생기 있는 조화를 한 손에 들고 동생과 나, 때로는 언니들도 같이 산길을 걸었다.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무덤이 있었고 무덤마다 한자로 쓰인 검은색 비석이 있었다.
구역마다 딱히 이정표도 없었고 일련번호도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엄마는 할머니 무덤을 잘 찾아냈었다.
우리는 꽤 자주 할머니 산소를 찾았었다.
가족관계의 개념이 희박했던 나는 무덤 속 할머니가 엄마와는 어떤 관계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어렸을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을 살펴보면 산소 배경의 사진이 많이 등장한다.
이번 설에 엄마에게 옛날에 왜 그렇게 자주 산소에 갔었냐고 물어봤다.
그 당시에는 집 외에 딱히 아이들을 데리고 갈만한 곳도 없었고, 백화점이나 유원지 등에 가면 돈을 써야 했기 때문에 놀이터 삼아 하루 때우기 좋아서 자주 다녔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다.
생각해보니 공원묘지 안에는 묘지와 자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를 절약하면서 보내야 했던 엄마의 선택이었는가 보다.
우리가 자주 찾아갔던 그 묘지의 주인은 외할머니라고 했다.
그 당시엔 어려서 왜 외할머니댁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분이 무덤에 누워계신지.. 두 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지력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얘기를 해준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께서는 지병으로 엄마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의 외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상처(喪妻) 이후에 새로 맞이하신 엄마의 새엄마라는 것을..
나중에 나중에야 알았다.
새 할머니는 엄마와 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외할머니는 그냥 정말 외할머니 같았는데..
몸빼바지에 흰 저고리를 입으시고 머리를 곱게 쪽 지어 단장하신.. 고운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엄마와 고작 다섯 살 차이밖에 안나는 분이었다니.!
엄마는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었고 나는 그걸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다.
가끔은 "엄마"라고 부르던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연기였을까.. 엄마라는 말이 쉽게 나왔을까..
나는 그래서 엄마를 낳아주시고 스무 살까지 길러주신 분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엄마는 가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얘기하실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의 내가 여기 이렇게 숨 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엄마가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인 것처럼, 엄마도 누군가가 배 아파 낳은 소중한 딸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까지, 내가 중년이 되기까지..
나는 살아가는 동안 한참 동안이나 엄마가 나와 똑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똑같이 어리광 부리고 기대고 싶었던 부모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처럼 좌충우돌했을 거라는 것..
여자로서 나와 비슷한 감정적인 경험을 해왔을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렇게 저렇게 어떤 길을 가다 문득 돌아보니, 내가 걸어왔던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의 자취가 남겨진 길 위에 나의 발자국도 그리고 엄마의 발자국도 함께 있다는 것이 비로소 보였다.
이 깨달음은 '우리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 엄마에 대해서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엄마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스스로 겪어봐야 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났을 때 내게 엄마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엄마는 내가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아이를 8년이나 봐주셨다.
서툰 결혼과 육아생활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낳은 사람은 나였지만 아이의 어린 시절 엄마는 할머니였던 것이다.
오늘도 많은 할머니들이 자기 딸을 위해서 그렇게 제2의 육아를 하고 계신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이후에 비로소 나는 정말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고 엄마의 삶을 공감하게 되었다.
엄마가 있다는 것.
내 옆에 계시지는 않지만 내게 엄마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심리적인 지지선이 되어주었다.
나는 엄마와 아주 친한 딸은 아니었다.
얼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결혼도 빨리 하였고 엄마에게 모든 것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입장이 되고 보니, 여자로서의 엄마의 삶이 보였고 엄마를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여자에게 엄마가 있다는 것..
내게 엄마가 있다는 것.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엄마가 할머니의 산소에 자주 찾아갔었던 이유도 엄마가 그리워서가 아니었을까..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엄마는 많이 아프다.
지병인 당뇨로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고 여기저기 자주 부러지고 다치신다.
무섭고 큰 산 같았던 엄마가 약해진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엄마, 최근에 엄마를 보면 정말 편안해 보이고.. 나이 들수록 엄마처럼 편안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멋지고 대단한 김수순 여사,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