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팔자는 '뒤웅박'팔자??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었던 그녀의 젊은 날

by 펜슬 스커트
'뒤웅박'이 대체 뭔가요?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을 혹시 들어본 적 있는지?

요즘 세대들이 듣기에는 너무 라테 같은 고대어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난 이 말을 자주 들었었다.

이 청승맞기 그지없는 말속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뒤웅박'에 대한 기사를 뒤져보니,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한 번에 풀어주는 기사가 하나 있다



뒤웅박이란?

“뒤웅박”이란 쪼개지 않고, 꼭지 가까이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어 만든 바가지를 말합니다. 사투리로 두뱅이ㆍ주룸박ㆍ두룸박이라고도 부르지요. 보통은 바가지처럼 둥글지만, 호리병처럼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박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뒤웅박이 터지거나 깨질 수 있기 때문에 대오리로 그물처럼 만들어 덧싸기도 했지요.

(우리문화신문, '여자 팔자는 왜 뒤웅박 팔자일까?', 2015.3.18)


이것이 뒤웅박이라고 한다. 핼러윈 데이 호박 등을 연상시키는 모양이다.


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일까?

이 기사에 따르면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기 때문에 여자가 어떤 집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담기는 내용물이 달라진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40살이 넘어서야 이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니...!

뒤웅박이라는 말이 캐캐 묵은 옛날 말인 것처럼 여자의 인생은 스스로 주도적이지 못하고 남편이나 아버지 등 타인, 특히 남성 타인에 의해서 결정지어진다는.. 운명론은 그만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진리 같은 고전이었던 것이다.



뒤웅박 팔자 1 : 일 많은 집 살림밑천으로 태어난 운명


엄마에게는 크게 두 가지 인생을 결정짓는 뒤웅박이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엄마의 출생이다.


또 캐캐 묵은 라떼 망언을 하나 해보겠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었다.


요새 세상에 이런 말을 감히 떠올린 다는 게 정신이 이상한 사람 이리만큼 여권(女權)이 신장되었다.

게다가 요즘엔 딸을 낳으면 아들 낳은 몇 배로 더 기뻐한다.

그만큼 딸들의 가치가 많이 상승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시절에는 남성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은 첫 딸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맡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엄마는 그런 '김문주 씨 집안의 살림밑천'이었던 것이다.


엄마네 집은 큰 양수장을 했는데 사실 가난하다기보다는 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주였으므로 꽤 부유한 측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 태어난 여자들에게는 아버지의 부가 본인의 미래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딸로 태어나면 어쨌든 집안일을 해야지, 무슨 공부냐!'

라는.. 사고가 마치 원래 머릿속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중학교를 중퇴했고, 양수장 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말 그대로 '살림밑천'이 되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엄마는 사회생활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생각도 크고, 통도 크고. 디테일보다는 좀 더 호방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처녀시절 엄마를 사진으로 보면 더더욱.. 짧은 배움을 가지고 살림을 알뜰살뜰 챙기는 그런 여성으로서만 살아가기엔 아쉬울 정도로 눈빛이 살아 있다.


정말이지 너무 귀한 엄마의 처녀시절 사진. 앞에서 세 번째 머리긴 처녀가 엄마다.



뒤웅박 팔자 2 : 가난한 집 장남에게 시집와 평생 쪼들리며 살 운명


사람마다 인생의 갈림길이 있다.

인생은 퇴로가 없는 직진의 세상이기 때문에 갈림길을 만나면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다.


내가 40대에 이르러 인생을 돌아보니, 그 순간순간의 '선택과 결정'이라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직장을 선택하느냐, 공부를 계속하느냐.

아이를 낳을 것인가, 낳지 않은 것인가.

이직을 하느냐, 퇴사를 해서 사업을 시작하느냐, 기존 직장에 머무르느냐.


또 한 가지 인생에서 몹시 중요한 결정은 '결혼'이다.


"결혼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누구랑 할 것인가.."


결혼이 특히 중요한 것은 인생 전반의 큰 갈림길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결혼한 사람과는 평생을 같이 살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결혼이라는 결정을 통해서 평생 내 인생은 지워지지 않을 큰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기에 정말 결혼이라는 선택은 무섭고 무거운 것이고, 그렇기에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내가 10대 시절을 지내는 동안, 엄마는 신세한탄을 할 때마다 아빠를 진짜 많이 원망했다.


엄마는 소위 그 시절 결혼이라는 결정을 통해서 심하게 망해버린 경우였다.


신분 상승을 꿈꾸며 결혼을 택하는 경우는 봤어도 엄마처럼 신분 하락을 스스로 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선택을 '스스로'했고 스스로의 선택은 엄마를 몹시 고단하게 만들었다.


배우자를 탓하는 주변 사람들을 자주 본다. 부부간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 자주 배우자 탓을 하게 된다.

나는 워낙 나의 '선택과 결정'이라는 것에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편이라 배우자를 욕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몰라서 결혼했나?' '자기가 선택한 거 아닌가?'


엄마가 아빠를 수시로 원망하던 내 10대 시절에도 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적어도 결혼만큼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출생의 뒤웅박은 어쩔 수 없었다 쳐도 결혼은 달랐다. 그러나 엄마는 가난이라는 뒤웅박 속으로 본인을 몰아넣었고 그렇게 평생을 돈 없이 쪼들리는 제2의 삶을 선택했다.


아빠는 동네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집 장남이었다.

할아버지는 특정한 직업이 없이 하루하루 술로 시간을 때우며 아내를 때리기를 일삼는 전형적인 무능력자였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무능함은 고스란히 할머니의 어깨에 짐으로 지워졌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파밭을 주로 경작해주고 품삯을 받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할머니의 팍팍한 삶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투영되었다.


아빠는 우리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받았던 폭력과 폭언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자식을 낳으면 잔소리하지 않고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결혼한 후에 엄마에게 왜 아빠랑 결혼을 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엄마는 처녀 때 너무 많은 가사노동에 정말 힘들고 지쳤었다고 한다. 아빠는 동네 친구였는데 집도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는 남자였다고 한다. 그런 아빠에게 시집을 가면 뭐든지 자기가 맘대로 하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의 장녀였던 본인에게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우는 친정을 도망치듯 떠나 아빠에게 시집을 갔다고 했다.


엄마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결정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만 엄마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결혼할 60년대 말에만 해도 남편에 의해서 아내의 인생이 결정나버리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엄마는 무시무시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처녀 때 복은 개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한참 국민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시절, 우리 동네만 해도 그렇게 부자인 사람이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서민의 동네여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더더 훨씬 많이 가난하다는 걸 모르면서 자랐다.


다만 불행하게 느껴졌을 때는 엄마가 본인의 처지를 한탄하며 아빠를 원망하고 본인의 선택을 그저 '처녀 때 복은 개복'이라며 별 도움도 안 되는 말들을 쏟아낼 때였다.


그때의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고 보니.. 여자로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엄마는 그때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일하러 나가서 주변을 환기할 수도 없고, 술을 마시고 놀면서 잠시 고단한 인생을 잊을 수도 없었다.


눈을 감고 그때로 돌아가면 집안일을 하면서 화를 내고 있는 엄마를 만난다.

30대 중반이지만 스스로 몸매를 가꾸지 못해 네 명의 아이를 출산한 후 몸은 엄청나게 불어있고,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머리를 한 찌들어 보이는 여자가 있다.

엄마를 가만히 안아주는 상상을 해본다.

'괜찮아, 잘 될 거아..'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던 엄마. 어린 우리들과 있는 엄마는 좀처럼 웃는 얼굴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엄마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몹시 충격적인 사실은 나이가 들어도 정서적인 불안이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실수, 잦은 후회는 똑같다는 것이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엄마 정도 나이가 되면 인생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 감정도 조절하게 되고.. 소위 말해 '완벽한 어른'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건 말짱 황당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열 살이던 나도 열 살을 처음 살아보고 있었고, 현재 마흔다섯 살을 살고 있는 나도 마흔다섯 살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미 내 나이를 살아본 사람들의 경험과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엄마의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의 시절은 속 섞이는 남편과 우글우글 많이도 낳은 아이들, 그리고 가난이라는 무서운 삶의 무게감으로 불행했을 것이다.

엄마는 딸이 셋이나 있는 여자였지만 딸들에게 여자로서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조언을 거의 해주지 않았다.

아마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이 여유가 없어지면 주변을 돌아보기 어렵고 사람을 대하는 성격도 까칠해진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내가 풍요로운 다음에야 주변이 보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엄마의 그 시절엔 그런 한 줌의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한다. 엄마가 우리를 두고 왜 그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를..

엄마에게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엄마'가 있었더라면,

마음껏 속에 있는 어려움을 쏟아낼 수 있는 '엄마'가 있었더라면..

힘들어하는 엄마를 꼭 보듬어줄 '엄마'가 있었더라면...


엄마의 마음속 상처가 조금은 옅어지지 않았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언니들보다 엄마와 친밀감이 크지 않아서 엄마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편은 아니었다. 결혼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게 엄마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 엄마의 존재감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내 심리적인 안정성 밑바닥에 든든한 지지가 되어주고 있는 살아계신 엄마.


어려운 결혼생활을 해나가던 엄마에게 '엄마'의 부재는 얼마나 쓸쓸하고 힘겨웠을까.


뒤웅박 팔자를 살아내신 사랑하는 엄마를 생각한다.


어렵게 찾은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이다.

한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안타깝고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형제들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엄마가 뒤웅박 팔자라는 무기력한 저주의 단어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만 했을 것이다.

엄마는 정말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젖먹이 막내가 눈에 밟혔다고 했다.

엄마가 없더라도 좀 큰 자식들이야 밥 먹고 학교 갈 수도 있을 텐데 막내는 대체 어디서 젖동냥을 해서 키울지..

엄마는 그런 게 걱정되었다고 했다.


결국 엄마의 발목을 잡은 건 자식들이었다.


엄마가 지금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동년배의 여자였더라도 할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하고 가난하고 능력 없는 아빠와 결혼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엄마에게는 뒤웅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적인 동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엄마의 인생을 돌아보면 뒤웅박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한 여자로서 엄마를 볼 때 많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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