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뜨거운 물에 넘어져 구르던 모습이 여전히 기억난다.
몇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억나느냐고 물어보면 난 잘 모르겠다.
나의 유년 시절 기억들은 파편화되어 있다.
유치원 다녔을 때쯤? 도 띄엄띄엄 기억이 날 뿐인데, 그보다 더 어렸지만 여전히 강렬하게 기억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슬픈,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였다.
엄마는 옷도 만들어주었었다.
그 시절 엄마들은 다 그렇게 맥가이버들이신가?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서 멜빵 치마를 만들어주시기도 했고, 바지도 만들어주셨다.
또 겨울이 되면 털실로 털옷을 만들어주셨다.
아이들은 금방금방 자라기 때문에 작년에 만들어 입힌 털옷이 올해는 작을 수도 있다.
엄마는 털옷이 작아지면 코바늘로 옷의 매듭을 풀고 실을 풀어서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 털실을 다시 뭉쳤다. 한번 모양이 갖춰져 짜여졌던 실은 풀어두면 구불구불 꼬깃꼬깃해져 있다.
이 구불구불해진 실에다 뜨거운 김을 한번 쐬어주어 감아내면 다시 새 털실처럼 곧아지는 모양이다.
엄마는 거실에 곤로를 갖다 놓고 곤로 위에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려놨다.
그리고 데워진 물 위에 털실을 올려서 감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내 기억 속에 마치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한 편의 연극처럼 장면 장면이 강렬하게 박혀있다.
작은언니가 엄마를 돕고 있었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냄비가 넘어져 마루에 뜨거운 물이 쏟아졌고, 이제 곧 세 살쯤 되는 갓난쟁이 동생이 그 물 위에 미끄러져 굴렀다.
나는 그 이후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언니들이 얘기해준 바에 의하면 엄마가 급하게 동생의 옷을 벗겼고 차가운 물로 몸을 씻긴 다음 바로 데리고 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동생은 그때 겨우 걸음마를 뗀, 여전히 엄마 젖가슴에 애착을 가지는.. 너무나도 여린 살결을 가진 그저 아기였다. 그러던 동생의 삶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병실 천장에 매달려있던 종이학이 얼굴을 살려냈을까..?
동생은 메리놀병원 화상병동에 입원을 했다.
병원의 장면중 기억에 남는 것은 동생 침대 바로 위에 실로 매달려있던 종이학이다.
화상은 사고를 당할 때도 끔찍하지만 이후에 어마어마한 고통과 큰 후유증을 수반한다.
뜨거운 냄비 같은 것에 손가락 끝만 닿아도 며칠 동안 아리고 쓰린데, 온몸이 다 데었다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드레싱을 하는 과정은 정말 끔찍했을 것 같다.
뜨거운 물로 인하여 이미 뭉개져버린 연하디 연한 피부 조직이 감염되지 않도록 상처 위에 소독을 할 때 엄마와 아빠는 정말 필사적으로 울음으로밖에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를 어쩌지도 못하고 피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상처가 아물어 더 이상 쓰리지 않고 새 살이 제대로 날 때까지 드레싱은 계속된다.
물론 그 새살이라는 것이 화상 사고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미로 편 것처럼 반듯하게 나오지 않는다.
새 살은 화상 사고의 그날을 똑똑히 상기시킬 만큼 강렬한 흉터를 남긴다.
동생은 필사적으로 엄마의 젖가슴에 매달렸다.
이미 이가 다 난 상태였기 때문에 젖을 물리면 안 되었는데 엄마의 젖가슴을 찾는 동생 때문에 엄마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동생은 엄마의 젖꼭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쎄게 엄마의 젖가슴을 물면서 빨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픈 것을 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 작은 몸뚱이는 말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겨우 세살쯔음이었다.
몇 차례의 이식 수술이 진행되었다.
동생의 그 작은 몸에서 그나마 피부가 괜찮고 넓은 허벅지 살을 잘라내서 화상을 집중적으로 입은 팔 쪽에 이식을 하는 수술이었다.
동생의 얼굴에도 물이 많이 튀었다고 하는데 얼굴은 이식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연고만 발라두었다고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식 수술을 위해서 도려낸 피부조직 역시 잘 아물지 못해 커다란 네모 사각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흉터로 남았고 이식 수술을 받은 화상부위 또한 피부 거부반응을 일으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결과 못지않게 크고 흉한 흉터를 남겼다.
종이학은 희망이었을 텐데.. 동생의 수술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했다.
엄마가 돌이켜 생각할 때, 피부가 여린 아기니까 그냥 수술하지 않고 두었더라면 몸도 지금은 흉이 적은 얼굴처럼 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를 했다.
희망의 종이학이 동생의 얼굴을 살려냈는가 보다..
니가 내 동생인 것이 가끔은 힘들었다.
동생은 아들 귀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출생의 특별함만으로도 이미 응석받이로 예약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원치 않는 화상 흉터까지 몸에 지니게 되었으니..
동생은 어마어마한 응석받이로 자랐다.
나는 남매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껴서 이도 저도 아니고, 주목받지도 못하는 셋째였기에 어려서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데다 독서광에 참하고 이쁘기까지 한 큰 언니와 아들 프리미엄에 아프기까지 한 동생 사이에 낀 샌드위치 같은 셋째.
나도 엄마의 사랑을 무던히 갈구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엄마와 가장 안 친한 딸로 자라났고 무엇이든 좀 억척스럽게 덤벼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나는 뭐 이만하면 잘 자랐다고 생각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냐는 말도 있듯, 스스로 애정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서러워했지만 부모님들은 나를 아꼈을 것이고 나는 무사히 성장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성격이 나약하고 공부를 못하는 동생을 마음속으로 많이 욕했다.
갈만한 대학이 없어서 지방 오지까지 원서를 들고 가족들이 출동했을 때는 참 녀석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그 아이의 인생을 무슨 자격으로 평가하고 폄하할 수 있었을까.
지금 그는 잘 자라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화상흉터를 지닌 채 살아간다는 것
본인이 기억조차 못하는 시기에 사고를 당했고, 이 아이가 스스로의 생을 기억할 수 있을 때쯤부터 사람들로부터 동정의 대상이거나 기피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려서는 친척들 사이에서도 화상 흉터를 보려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자랐을 것이다.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초등학교 때부터는 친구들과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에 많이 위축되고 소심해졌을 것이다.
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동생의 화상흉터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집에서조차 흉터가 드러나는 팔목에 항상 흰 붕대나 아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그의 인생을 짐작해보지만 그 아이 인생의 전반에 이 사고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생은 사춘기가 되면서 많이 어둡고 말수가 없는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아이로 자랐다.
동생과 화상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본 적이 없다.
그가 신체의 아픔을 극복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겨냈는지, 혹 누군가 놀리는 친구는 없었는지..
동생이 특히 싫어하는 얘기가 화상에 대한 얘기인데, 기회가 되면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동생과 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의 가슴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인 슬픔이 있다면 누나로서 내가 그 슬픔을 그의 밖으로 퍼내고만 싶다.
엄마의 자책,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종신형의 죄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운이 좋지 못했을 뿐이고 순간의 실수였다.
그러나 엄마는 모든 일이 본인 때문에 생긴 일이라 받아들였다.
'아들을 너무 귀하게 대한 것이 삼신할미의 미움을 산 것만 같았고, 그날 왜 그런 위험한 짓을 거실에서 했을까, 뜨거운 물에 아이가 넘어지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었을까, 내가 대신 막았어야 하는데...'
엄마의 가슴속 응어리는 동생의 화상 흉터만큼 깊고 흉하고 또 평생 지울 수 없다.
자식에게 변고가 생기면 부모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종신형의 죄를 받는 것과 같다.
동생은 대학교를 가지 못했고 오랫동안 마트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했다.
결혼도 마흔이 가까워서야 했다.
동생이 일견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 엄마는 내내 엄마의 잘못인 것만 같았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나이 든 동생과 오래도록 함께 했다.
상처가 슬픈 것은 상처로 인하여 서로 더 결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몸의 상처는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만들어낸다.
엄마와 동생은 같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서로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각자 아파하고 서로를 원망하면서 힘든 시간들을 견뎌냈다.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더라면 동생이 상처도, 엄마의 종신형의 죄도 조금은 가벼워졌을 텐데..
요즘엔 이미 성인이 되어 본인의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는 동생을 떠올릴 때 나는 더 이상 화상의 흉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제2의 인생을 꾸리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부터 왠지 몸과 마음의 상처가 조금 옅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로 그랬기를,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그 흉터가 소중한 동생을 괴롭히지 않기를..
이 아이가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흉터가 거기 어떠한 방해도 할 수 없기를
오늘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