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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Jun 01. 2021

총 일곱 명의 아이를 키웠다.

친정 엄마가 살아계신 최고의 특권을 누렸다.

엄마는 네 명의 아이를 낳고 일곱 명의 아이를 키웠다.

지금 엄마는 고향인 부산을 떠나 수도권에 살고 계신데, 딸이 낳은 아이를 키워주시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는 결정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 남매들은 수도권에 자리를 잡고 부모님을 자주 뵐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지역의 이방인이다. 나도 내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냈던 부산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이제는 훌쩍 더 많아졌지만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채 갑자기 붕 뜬 느낌이 든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게 편안함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부모님보다 삶이 짧은 내가 그런데.. 50년을 넘게 부산에서만 사시던 부모님의 서울행은 얼마나 큰 상실을 감내할 각오를 하셨을까.


지긋지긋했을 육아의 고통을 참아낸 엄마


엄마는 먼저 큰언니의 쌍둥이를 키웠다. 큰언니는 시험관으로 쌍둥이를 출산했다. 엄마는 언니네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이란성쌍둥이 중에서 오빠인 아이를 전담해서 키웠다. 요 녀석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끈기가 있던 놈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고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니들이 조카를 낳았을 때도 사실 그저 아기인 것이지 너무 이쁘다던지, 사랑스러워서 자꾸 보고 싶어지지는 않았다. 소위 요즘 말하는 랜선 이모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냥 즐거운 싱글로 내 삶을 살았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 언니들은 아이를 낳고 치열한 육아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라고 60이 가까운 나이에 다시 '육아 어게인'을 하고 싶었을까.

애를 여럿 낳으면 육아의 예민함은 훨씬 무뎌질 것 같다. 그러나 결국 한 인간이 온전하게 자라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될 때까지 20년이 넘도록 보듬어주고 보살펴주고 수없이 속 터지는 속앓이가 있어야 한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내 맘처럼 되는 것이 하나 없는 게 육아인 것 같다. 엄마는 기꺼이 딸들을 위해서 육아를 다시 반복했다.


엄마가 쌍둥이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내가 뒤늦게 임신을 했다. 결혼초부터 아이를 낳지 않을 각오로 나는 결혼하자마자 피임을 시작했다. 3년간의 피임, 한 번의 유산. 그러고 나서 아이가 생겼다. 엄마는 어려서는 몸이 약했고, 대학 간 이후에는 방탕하게 살았던 딸이 내심 오랫동안 아이를 못 가지자 초조해했다. 혹시 불임의 원인이 당신의 딸에게 있진 않을까, 아이가 없으면 시댁에서 싫어하시지는 않을까..'하나는 있어야지, 부부 사이에..'라고 자주 말하시던 엄마는 그때부터 내가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당신이 키우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엄마 딸이 고생할까 봐 애를 봐주셨던 거야...


나는 출산 이후 많은 산모가 코스처럼 가는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았다.  아이를 받아 안고 곧바로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서 나는 한의원을 다니면서 그렇게 산후조리를 하고 출산휴가를 보냈다. 아이를 안고 집에 들어서자 엄마와 아빠는 달려와서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는 산후조리를 해야 되니까 아이 보는 시간을 많이 줄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아이를 내놓지 않으셨다. 엄마와 아빠가 원래부터 아이를 많이 좋아하셨던 분임은 맞다. 그러나 딸의 산후조리까지 마다하지 않고 직접 해주셨던 이유는 비단 그것만은 아니었다. '내 새끼가 새끼를 낳아서 고생할까 봐 그랬지.'라고.. 엄마가 얘기해주신 적이 있다. 엄마의 새끼인 내가 아이를 낳고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의 아들을 봐주셨던 것이다.


육아 경험 많았던 부모님은 아이가 손을 타서 양육자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적당히 안아주었고 아이 또한 세 명의 합심한 양육자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우유 잘 먹고 크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무탈하게 순하게 커갔다.



아들을 낳고 비로소 내 생일날은 엄마의 날임을 알게 되었다.


아들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1년간의 과정은 정말 너무 생경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1년간 임신한 몸을 유지하면서 나는 가끔 내가 동물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몸에 개의 심장이 함께 뛰는 경이로운 경험은 출산의 권리이의무를 지닌 여자만의 특권이자 모성애라 불리는 감정이 생겨나는 시간의 원천이다.


2009년 1월의 함박눈이 내리던 날 나는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하면서 몹시 힘들고 고통스러웠고 출산 이후에도 몸은 불편했지만 산부인과는 쾌적했고 선생님들은 친절했다. 겨울이었음에도 아이를 낳느라고 흘린 땀, 엉겨 붙은 피 덩이 등이 너무 찝찝했다. 일주일간 씻지 않는 산모도 있다지만 나는 퇴원하고 친정에 가자마자 샤워를 했다. 그러면서 문득 엄마를 생각했다.


우리 남매는 모두 여름과 이른 가을에 태어났다. 아주 더울 때 태어났다. 엄마가 우리를 낳던 70년대에는 병원에 에어컨 시설도 시원찮았을 텐데 출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일은 탄생일로서 축하받는 날이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나를 낳아주신 엄마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아들을 출산하고야 깨달았다. 임신한 10달 동안 뱃속의 아이는 엄마 몸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때부터 엄마는 아이에게 본인의 몸을 나눠준다. 출산의 과정은 사실 산모에게 상당히 위험하다. 그리고 산모는 출산을 하는 약 24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 출산 과정 동안 산모 몸의 모든 관절은 다 늘어나고 몹시 쇠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 후에 관리를 잘해야 만성 통증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 같다.


생일은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위험하면서도 위대한 출산을 감당해낸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한 날이다. 내 생일이 오면 나는 엄마를 생각한다.

'그 더운 한 여름에 나를 낳느라 죽을 고생을 하셨을 엄마! 제 생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한 생명을 무사히 태어나게 해 주신 것, 축하드립니다. '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나는 출산휴가 3개월이 끝나고 회사로 복귀를 했다. 아이는 부모님 댁에 남겨졌다. 부모님 댁과 우리 집이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주중에는 부모님 댁에 있었고 주말에 우리와 함께 했다. 부모님은 8년 동안이나 아들을 봐주셨다.


꼬물꼬물 갓난아기 시절, 미운 네 살, 여섯 살 유치원생 시절...

아이의 유년기를 함께 한 부모님은 8년 동안 아이의 주 보호자이면서 아이의 엄마 아빠 역할을 해주셨다.

육아가 가장 고된 정점에서 부모님은 기꺼이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주셨다.


우리 아이와 부모님 사이에는 여전히 각별한 애정이 존재하는데, 8년 동안 늙은 부모로서 에너지 넘치는 아이를 감당하셨을 땀과 눈물 기쁨과 속상함이 고스란히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 안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면담이 있어 담임 선생님을 뵈었을 때였다.

'저희는 아이들을 보면 누가 키워주시는지 알 수 있어요. 엄마가 직접 키우는 아이, 할머니가 봐주시는 아이.. 보면 딱 알거든요. 진진이도 할아버지가 데리고 오더라고요. 그런데 진진이를 보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다.


이 보다 더한 칭찬이 있었을까!

부모님께서 8년 동안 그들의 건강과 에너지와 시간을 갈아 넣어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이는 정말 맑고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랐다. 편식도 없었고 주변 어르신들께 인사도 잘하고 말도 곧 잘했다. 그거면 된 거다.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않았고, 조기 교육도 별도로 없었지만 건강하고 바르게, 행복하고 맑게.. 엄마 아빠의 클래식한 육아 방식 안에서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났다.


친정 엄마가 살아 계신 최고의 특권


회사에서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자 동료들에게 아이는 누가 봐주냐고 물어보면 80% 이상이 '친정 엄마'라고 대답한다. 딸 내 집에 출퇴근하시는 엄마, 친정에 아이를 맡긴 경우 등등 사연도 방식도 가지각색이지만, 회사 다니는 딸의 가장 큰 조력자는 친정 엄마이다. 한국사회에선 친정 엄마가 없으면 회사 생활도 하기 어렵다.

 

딸이 회사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히 많은 친정엄마가 '자기 새끼 힘들까 봐.'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육아 전선에 뛰어든다. 당신들은 못했지만 딸들은 사회생활하라고 그렇게 기꺼이 외손주를 맡아주시는 것이다.


친정 엄마가 안 계신 딸은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친정 엄마가 살아 계신 최고의 특권을 누린 딸이다. 감사하게도 엄마가 계셔서 혼자였다면 결코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어린아이 육아의 터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왔다. 내가 아무렇지 않았던 만큼 엄마는 힘들었을 것이다.


총 일곱 명의 아이를 키워내신 엄마. 진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 진진이 이렇게나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 아이의 생물학적 엄마이지만, 가슴으로 낳아주신 절반의 엄마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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