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평가결과가 나왔다
직장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성적표를 받는다.
KPI, PMDS.. 내가 다닌 직장마다 멋진 영어 이름은 달랐지만 결국 성적표이다.
연초에 수립한 업무 목표 중 얼마나 많은 목표를 어떤 수준으로 달성했는지 체크하여 평가한다.
항목별 평가는 수립한 목표에 따라 절대 평가지만 종합평가는 구성원 간 상대평가이다.
평가결과에 따라 연말 인센티브, 승진, 내년의 연봉 인상률 등이 정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평가결과가 나왔다.
사원, 대리 시절처럼 평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굴지 않는 나이와 연차가 되었지만 평가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항상 궁금하다.
작년에 나름 스스로 열심히 했고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왠지 평가결과를 확인하는 나의 손끝에 작은 기대감이 있었다. 예상한 결과가 나와서 기분이 좋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칭찬받거나 성적을 잘 받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우리 형제들은 딱히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개중에 내가 조금 나은 편이었는데, 성적표를 갖다 드리면 엄마가 항상 기뻐하셨다.
그래서 성적표를 받는 날은 기뻐할 엄마 생각에 더 기대가 되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보다는 중학교,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조금씩 성적이 올랐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엄마에게 계속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고2 1학기 때 왕따를 당하면서 성적이 떨어졌다.
학기말에 받는 학업우수상을 놓쳤다.
그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왕따는 왕따고.. 공부는 공부라고.
공부로서 왕따를 이겨보겠다고 다짐했다.
1994년 여름, 김일성이 죽고, 너무나도 더워서 단축수업을 했던 역사적인 여름에 나는 내면의 나를 성찰하며 학창 시절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몰입해서 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무슨 대학을 가겠다든지,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미래의 꿈은 없었다.
그저 엄마에게 떨어진 성적을 보이는 게 싫었고,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2 때 내가 공부의 끈을 놓고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나를 잡아주었던 것은 엄마였다.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모범생에 가깝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반골 기질, 욱하는 성격, 아웃사이더 성향을 가진 내가 그럭저럭 무난히 학업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분이었다.
만년 차장인 딸이지만 엄마에게는 귀한 자식이다
엄마는 요즘도 가끔 남편에게 내 자랑을 하곤 한다.
'박서방~ 나는 우리 딸한테 공부하라고 한 번도 얘기 안했데이. 밤에 공부하고 있으면 전기세 아깝다고 불 끈다고 그랬는데 그래도 그 밤에 공부를 하고 하데..'
그랬던 엄마의 딸은 마흔 중반을 넘어서도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성적표를 받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딸일 것이다.
회사에서 질책을 당하고 저성과자로 취급받고 루저로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자 반려자이자 부모일 것이다.
평가가 그지 같더라도 상심해말자.
잊지 말자. 나는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 명절날 그래의 집을 찾아온 친척에게 엄마는 그래가 일을 잘하고 인정받는다고 자랑을 한다. 그러나 장그래는 계약직 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