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 관종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학원 하이틴 소설을 읽으면서 굉장히 이상적인 학교 생활을 꿈꿨다.
초등학교때 '의적 당근'라는 유치한 소설을 읽고 '의적 사과단'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나의 영어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는 Anne .
좌충우돌 빨강머리 앤의 성장기 또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꿈같이 멋진 자연이 있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펼쳐지는 빨강머리 앤의 상상력 가득한 모험의 세계와 그녀의 실수, 그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는 그런 삶을 동경해온 내게는 정말이지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중학교를 진학하면 좀 더 재미있고 유쾌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날 것이고 나의 중학교 생활은 흥미진진할것이라는 막연하고도 말도 안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1990년 4월 1일 사회 수업 시간에 사고를 쳤다.
그날은 만우절이었다.
분필가루가 잔뜩 묻은 칠판 지우개를 문사이에 끼워두어서 들어오는 선생님에게 분필 가루 세례를 맞게 한다든지, 교탁을 교실 뒷쪽에 두고 모두 돌아앉아서 선생님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든지..
요즘 애들은 만우절날 선생님에게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 그런 장난들을 많이 친다고 들었었다.
그러나 우리반 아이들은 싱겁게도 그런 장난따위를 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꽤나 점잖고 얌전한 소녀들이었던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만우절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근처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작년에 울 언니는 선생님들한테 안아달라고 했대. '안아주세요'가 일본어로 '사탕주세요'랑 같은 말이라던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귀는 갑자기 쫑긋하고 온 몸에 에너지가 싹 돌면서 전투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 '안아주세요'라는 말이 '사탕주세요'라고?'
나는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나는 나의 짖궂은 장난을 받아줄 대상으로 사회 선생님을 골랐다.
사회 과목 선생님은 키가 크고 멀뚱하게 생긴 남자 선생님이었다. 그냥 뭐랄지 사람이 착해보이는 느낌적인 느낌?
어른이 되고 나서 이미지조차 희미한 그를 떠올려보면 그저 그는 그냥 보수적이면서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고 수업에 열정이 없는 아저씨였다.
그런 무관심과 무열정의 모습이 그 당시에는 착하다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사회 수업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손바닥만한 쪽지를 준비하고 나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쪽지에 나는 깨알같이 '안아주세요'를 여러번 반복해서 썼다.
설명하기 너무 부끄럽고,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 나는 그게 귀엽고 받아들여질만한 장난이라 생각했다.
사회 수업이 한 40분쯤 지났을무렵 나는 선생님에게 쪽지를 건냈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주목받을만한 불필요한 행동이나 발언 따위는 하지 않으려는 지금의 내가 보기엔,
열네살, 중학교 1학년의 나는 너무너무 대책없고 무모한 아이였다.
와..그 수업시간중에 쪽지를 건내다니!
지금의 나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결론적으로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반응 - 웃어 넘긴다든지? 이게 뭔지 물어본다든지? 아니면 진짜 찰떡같이 알아듣고 사탕을 주신다든지?-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당황하고 불쾌해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사회 시간이 끝났다.
사회 시간의 작은 사고가 이렇게 큰 나비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는...32년전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수학여행도 못 가게 되었다.
담임 종례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까먹지 않았다.
내 사춘기의 시작을 아주 조저버린 지금도 생각하면 부들부들 화가나는 쓰레기같은 여자.
선생님도 사명감이 있고, 아이들을 전인적인 관점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선생이 되면 안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란 존재가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절대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례시간에 그녀는 사회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을 아이들 앞에서 공개하고 나를 심하게 뭐라고 했다.
그당시 그녀의 발언은..거의 내가 중범죄에 해당하는 일을 한듯한 독설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늘 밝고 궂은일도 도맡아해서 제1호 성실상의 주인공이 었던 나는, 그때부터 서서히 소심하고 눈치보고 말이 없는 학생이 되어갔다.
담임은 사사껀껀 나의 행동에 토를 달아 주눅들게 만들었다.
아마도 문제아는 초장에 잘 밟아줘야 애들 관리가 편하다는, 그녀 나름의 선생으로서의 노하우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가 쪽주는 바람에 확실히 배운 지식도 있긴하다.
그녀는 국어선생이었다. 국어시간에 우리는 김소월(金素月)의 시를 배웠다.
"김소월 한자가 무슨 뜻일까"
하고 담임이 우리들에게 물었다.
'음..월자는 달 월인데, 소자가 뭐지?' 라고 짝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짝과의 대화였다.
"달 월자 모르는 사람도 여기있나? 배은지는 달월만 알고 있다고 하네. "
라고 짝 대신에 옆에 있던 그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대체...왜 그러는건지..
사람을 괴롭힐 줄 아는 고문기술자들은 꼼꼼하고도 성실한 사람일 것이다.
작은 빈틈도 놓지지 않는다.
나는 그날 김소월의 한자 소가 흴 소라는 것을 배웠고, 소복입은 귀신이라고 말할 때도 흴소를 쓴다는 것도 똑똑히 배웠다. 32년 지난 지금도 그날의 그 교실과 김소월 한자는 잊지 않고 있다.
재수가 없으려니..2년 연속 그녀가 나의 담임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때 모두가 당연히 다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이유는 그녀가 내가 가지 못하도록 나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압박에 나는 수학여행 가기를 포기했다.
나는 지체장애인 친구 한명과 따로 여기저기 견학을 다녔다.
내가 그렇게 싫었을까..?
왜 뭐때매..?
그렇다고 내가 문제아였냐..하면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열정과다였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에 열정있고 좀 튀는 아이들은 있다.
우리반에 나말고도 있었던것 같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일탈을 일삼는 문제아들은 더 많았다.
그러나 2년간 그녀의 타겟은 오로지 나였다.
늙어갈수록 기억과 상처는 또렷해진다.
나이가 들면 잊어질 줄 알았다.
아니 졸업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우울했던 중학교 시절을 잊고 살았다.
나의 우울감이 어디서 오는지, 내가 왜 이렇게 소심해졌는지..
나에 대한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보다보니..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때부터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들과 상황들, 그 여자 ..모두 다 생각났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어갈 수록 기억과 상처는 또렷해지는 것 같다.
강렬한 기억의 순간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았던 일들은 그냥 잊혀지지도 치유되지도 않는다.
그저 의식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가 비오는 날 신경통처럼 이따금씩 나타나서 괴롭힌다.
오늘 전화 영어선생님과 만우절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 불연듯 사회수업이 생각났다.
그날은 사춘기에 막 접어든, 어른으로서 나의 성격과 인격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하던 나의 날들에 누군가가 큰 변화의 방향키를 누른 날이었다.
나처럼 관종인 아이를 다르게 대할 수 있는 백만가지 방법이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가장 모질고 가장 아프고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14살의 아이를 눌러버렸다.
캐캐묵은 날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찌질하고 뒷끝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그냥 점잖은 어른처럼 나의 분노를 숨기고 싶지 않다.
꼭 만나고 싶다.
32년전 그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