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대한민국
얼마 전 장마철에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2년 전 찾은 제주도 비와 함께였는데, 이번에도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흔히 여행지에서 비 오는 날씨를 불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야외 활동이 많고 천혜의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제주도에서 궂은 날씨가 많은 제약을 가져오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2년 전 제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고, 비 오는 제주가 얼마나 운치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나 설레는 마음으로 떠날 제주 여행. 혹여나 일기예보가 우산 모양으로 가득하다면, 이 글이 조금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우(雨)도 한 바퀴
2년 전 제주를 찾았을 때, 부속 섬 우도(牛島)에서 혼자 2박을 한 적이 있다. 본격적으로 섬 투어를 하기로 한 둘째 날 아침,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 날 아침에는 배도 뜨지 못 할 정도로 비가 와서 섬 안으로 들어올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덕분에 그 날 아침 우도는 한적하니 좋았다)
우비를 하나 사 입고, 자전거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우도는 규모가 작아서 자전거로 한두 시간이면 섬 전체를 돌 수 있다. (스쿠터나 전기차도 대여 가능한데, 비 오는 날엔 사방이 막혀있는 전기차가 더 나을 수 있다) 해안을 따라 섬의 서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바람도 세차고 중간중간 우비 모자가 벗겨져 비를 쫄딱 맞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대로 낭만적이었다. 자유와 해방감, 젊음 같은 것이 바람과 함께 내 가슴을 통과했다. 반대편에서 나와 같은 행색으로 달려오는 자전거 족들을 보니 묘한 동질감이 들어 반가웠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그들도 나와 같은 기분에 젖어있음이 느껴졌다.
이따금씩 빠르게 돌아가는 바람개비들, 알록달록 예쁘게 칠해놓은 조개들, 그리고 이 날씨에도 바닷가에서 뭔가를 캐는 도민들이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자전거의 매력은 이렇게 멈추고 싶을 때 멈춰서 담고 싶은 순간을 바로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든 카메라로든.
이 날 먹었던 음식들은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데, 비 오는 날씨가 아니면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 날씨와 찰떡인 메뉴였다. 빗길을 뚫고 허기진 배로 먹은 첫 끼니 우도 땅콩 흑돼지버거 맛있었지만, 특히나 비 오는 바다를 보며 마셨던 따뜻한 땅콩 아인슈페너와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쯤 먹은 해물 라면은 지금도 두고두고 생각날 만큼 잊을 수 없다. (우도는 땅콩으로 유명해서 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곳곳에서 판다) 비 덕에 수십수백 배는 맛있었던 식사. 이 맛을 위해 비를 내려준 듯한 하늘에 되레 감사했다.
이 날 고생을 안 했다면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원래 고상한 것보다 고생한 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 아니, 그 고생이 미미하게 느껴질 만큼 이 날의 자전거 여행은 너무도 즐거웠고, 가슴 벅찼다. 비 오는 제주를 온몸으로 체험해보라. 잃어버린 젊음도 돌아오는 기분이다.
추적추적 전시 투어
그래도 역시 비 오는 날은 고생보다 고상이지,라고 생각한다면 전시회 투어만 한 것이 없다. (카페 투어도 좋지만, 그것만 하기엔 너무 심심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 내리는 날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한다. 대학 시절 부산에 놀러 갔다가 전시를 보러 잠시 대구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날도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전시가 열린 대구 국립 미술관은 건물 자체도 멋스러웠지만 비에 젖어 분위기까지 한층 더해졌고, 그때 받은 인상이 너무 커서인지 비 오는 날 전시회에 가는 게 좋아졌다.
이번 여행에서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본태박물관을 찾았다. 같이 가는 친구들도 모두 전시 관람에 어느 정도 흥미가 있어, 딱 맞아떨어진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태박물관은 5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의 입구가 모두 달라 우산을 들고 전시장을 옮겨 다니며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밖을 걸을 때마다 풍겨오는, 비에 젖은 풀 내음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시는 불교미술, 전통 상례, 전통공예 등과 관련된 전시와 함께 쿠사마 야요이 전 (작품은 두 개뿐이지만, 거울방에서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어 인기가 많다), 백남준과 몇몇 아티스트들의 작품들로 구성된 현대미술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많아 보이지만 한 관당 작품들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 관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전시장은 풀과 나무,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과 함께한다는 인상이 들었다. 이는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본태 박물관에는 건물과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고 한다. 특히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2관 건물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2층까지 하나로 이어진 높은 통 유리창을 통해, 1층에서는 잔디 정원이, 2층에서는 저 멀리 섬과 바다가 보인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건물들도 굉장히 멋스러워서, 중간중간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 서야 했다.
제주도에는 본태박물관 외에도 한 번쯤 가보면 좋을 만한 수려한 건축물들이 많다. 미리 관람을 예약을 해야 하는 비오토피아 수풍석 박물관 같은 경우, 본태 박물관 바로 옆에 있어 함께 방문하면 좋다. (우리는 예약을 미처 못해 못 갔지만, 다음에 꼭 가보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
내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니, 꼭 날씨가 맑아야만 제주의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비 오는 우도에서는 온몸으로, 또 박물관에서는 건축과 함께 자연을 느꼈다. 제주에서 비가 내려서 바다를 못 본다고, 혹은 오름에 못 오른다고 풀이 죽어 있을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그때가 제주의 자연을 또 다른 방식으로 체험할 기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