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베트남
이전 회사에서 알게 된 지인 분께 모처럼만에 안부 인사를 건넸다. 얼마 전 호치민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디지털 노마드들이 많이 가는 도시라면서 인터넷 사이트 링크를 하나 보내주셨다.
디지털 노마드. 디지털 기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업무 형태이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모습.
그 인터넷 사이트는 이런 형태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정보를 소개해주는 사이트였고, 과연 호치민은 디지털 노마드들에게 인기 있는 전 세계 도시 20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서울은 6위라는 사실!) 호치민에 갈 때만 해도 이런 구체적인 사실까진 몰랐지만, 적어도 내가 이 도시에 끌린 데에는 내가 꿈꾸는 그런 미래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호치민은 물가도 저렴하지만, 카페 문화가 잘 자리 잡힌 도시다. 카페가 주 일터이기도 한 디지털 노마드에게 이 도시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실제로 내가 간 몇몇 카페에서는 노트북으로 작업 중인 외국인들이 꽤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묘하게 흥분된다. 그들에게 나의 먼 미래를 대입시켜보기 때문일까.
나는 일반 여행객들보다는 호치민에 좀 더 오래 머물렀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카페 투어도 그만큼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호치민은 볼거리가 많지 않아 일반적으로 1박 정도 한다) 이번 글에서는 이미 디지털 노마드이거나, 혹은 곧 그렇게 될 사람들을 위한 호치민의 카페 두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1. The Workshop Coffee
첫 번째 카페는 내가 가고 싶었던 카페들 중에서도 가장 가고 싶은 곳이자, 실제로도 가장 마음에 들어 두 번이나 방문했던 곳이다. 이름부터 벌써 일을 하러 가야만 할 것 같다..
건물 입구부터 서양 분위기가 물씬 풍겨지는데, 어둑한 건물 1층을 지나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천장에서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위층 공간으로 이어진다. 아직 카페 안으로 들어서기 전이지만, 카페로 향하는 계단 곳곳에 이 곳의 손길이 닿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넓고 쾌적한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한가운데 커다랗게 자리 잡은 카페 바를 중심으로 테이블들이 벽면 창가를 따라 빙 둘러 있고, 일하기 편한 크고 긴 테이블도 한 켠에 놓여 있다. 벽마다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어, 갤러리를 겸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테이블만 빼면 정말 갤러리 같다)
이 곳은 커피뿐 아니라 브런치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사 메뉴가 있어, 일하면서 식사하기도 좋다. 커피는 드립 커피 전문인데, 메뉴판에 다양한 브루잉 방식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고, 원하는 원두와 브루잉 방식을 선택해서 마실 수 있다. 메뉴판도 그렇고 직원들도 모두 프로페셔널한 느낌이다. 나는 드립 커피 한 잔과 에그 베네딕트 하나를 주문했다. 가격은 한국 물가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 결코 저렴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 보상할 만한 맛과 퀄리티를 보장한다. (드립 커피도 그렇지만, 에그 베네딕트 정말 맛있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었는데, 아직도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아마도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여러 가지 메뉴를 시키고, 여러 각도에서 카메라에 열심히 담아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으로 보아 파워 블로거나 기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글에도 내가 느낀 것들이 비슷하게 담겼을까. 확실한 건 그녀도 나 만큼 이 카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
마지막 날 공항 가기 전에 나는 이곳에 한 번 더 들렸다. 그때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낮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낮의 열기가 가라앉고, 뭔가 더 차분하고, 한산해진 느낌이었다. 여전히 일하고 있는 사람도 듬성듬성 보였고, 미술 작품들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서는 낮이든 밤이든 일이 정말 잘 될 것 같다고 또 한 번 생각했다.
2. Trung Nguyen Legend Café
Trung Nguyen Legend는 베트남의 대규모 커피 브랜드로, 원두도 판매하고, 카페도 운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G7의 제조사도 바로 이 곳이다. 호치민에만 이 카페가 열 곳은 있는데, 내가 방문한 지점은 오페라 하우스 부근, 프랑스식 건물들이 즐비한 길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 1층이 내려다 보일 수 있게 오픈된 구조다.
이 카페의 매력은 정통 베트남식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인데, 함께 나오는 필터에 직접 물을 붓고 내려서 먹을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카페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베트남 커피 메뉴에 붙은 이름들이다. The Energy for Success (성공) / Creativity (창의성) / Ideas (아이디어) / Discovery (발견) 등, 사용되는 원두에 따라 각각 이런 식으로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가장 비싼 The Energy for Prosperity (번영)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비싸다고 느껴지는 드립 커피 가격과 비슷했다. 나는 번영보다는 창의성을 더 중시하므로.. The Energy for Creativity를 선택했다.
이렇게 메뉴판 앞에 서있을 뿐인데,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특히 나처럼 원두 맛의 차이를 깊이 있게 분별하지 못하는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독특한 메뉴 이름은 결정을 일으키는 데 영향력이 꽤 크다. 내 선택으로 보아, 나는 분명히 성공하거나 번영한 사람보다는, 유니크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이러한 소소한 듯 소소하지 않은 네이밍 전략, 혹은 브랜딩이 나는 참 좋다.
일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그 장소가 일하기 좋은 환경인지를 가장 먼저 따져봐야겠지만, 이런 에너지 충만한 이름의 커피를 마시면 일하기 위해 내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기분 탓으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플라시보 효과처럼 말이다.
내가 방문한 한낮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자리도 많았지만 1층은 이미 만석이었다. (마치 장사 잘 되는 스타벅스 지점 같달까) 2층으로 올라가니 구석자리가 비어있었다. 확실히 1층보다는 한산해서, 업무 미팅을 하러 온 듯한 사람들도 보였다. 피크 타임이 지나고 늦은 오후쯤 되자 사람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스르륵 빠져나갔다. 이때쯤 방문하면 좀 더 조용한 환경에서 베트남 커피를 음미하며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커피는 확실히 쓰다. 다크한 원두를 좋아하는 나조차도 엄청 쓰게 느껴져, 설탕을 계속 커피에 부어댔다.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이 베트남 커피.. 묘하게 중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