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구말은 너무 어려워

미국에 간 겁쟁이 시리즈

by 글동

가능하다면 옹알이하던 시절의 나를 보고 싶다. 버벅거리고, 답답해하고, 그나마 할 줄 아는 몇 개의 단어들로 힘겹게 끙차, 끙차 문장을 만들던 그 어린 날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 동그랗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아주 큰 소리로 말해 줄 것이다.


“울어! 맘대로 말이 안 나오면 그냥 울어버려. 맘껏 울어! 나중에는 울지도 못해!”


그래, 그렇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다가 억! 하고 막혀버리면, 얌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다. 말이 안 나와 답답하다고 울어버리기엔, 나는 너무 커 버렸으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늘 영어수업을 들었고, 중학생 때는 나름 시골 동네 학원에서 영어 에이스로 통했다. 고등학교 때도 영어는 나름 나만의 믿을 구석이었다. 영어 단어를 달달 외우고, 문장의 문법 구조를 샅샅이 파헤치는 것을 나는 꽤 즐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현재 미국 생활에 크게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모두 나의 착각이었다. 영어를 적당히 듣고 읽을 줄 아는 것과 영어로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한국말로 일하고, 대화하고, 오로지 한국말로만 생각할 수 있던 내가 영어의 고장 미국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그 당혹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초, 중, 고, 대학까지 통틀어 무려 17년을 공부해 온 언어였다. 그나마 제일 친숙한 외국어인데도 영어는 도저히 내 입에 담을 수가 없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Hi, How are you’라는 말에 기본적인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비록 원어민들이 실제로 자주 쓰는 문장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입에 닳도록 배웠던 ‘I’m fine thank you, and you’를 내뱉는 게 소원일 지경이었다.


나는 그저 상대방에게 미소를 짓거나 ’i’m good’을 아주 작은 소리로 바닥에 내뱉기만 했다. 당연히 그 문장은 바닥에서 흩어져 상대방의 발 끝에도 닿지 못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마트에서 ‘sorry’라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아 어글리 코리안이 된 기분에 하루 종일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어렵고 복잡한 문장이 아닌데도 내 입은 영어를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자꾸만 거미줄을 쳤다.


그러다 며칠 전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음식점에서 점원의 말에 ‘yes, please’라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나는 내 뒤통수를 아주 반질반질 윤기가 날 때까지 한껏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신나서 남편에게 얘기하자 ‘이제야 네가 영어를 받아들이나 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내 혀를 비롯한 구강구조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시차적응하는 것도 3주나 걸렸는데 갑자기 낯선 언어를 내뱉어야 하는 너네는 오죽했을까.. 너희한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내가 놓쳤다’


나는 어쩌면 일한 지 두 달 된 신입사원에게 프로젝트 팀장을 맡기는 악덕 사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한때 어딜 가나 울려 퍼지던 이 노래 가사처럼 영어로 내뱉는 첫마디는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인 건 우리에게는 늘 조금 더 나은 두 번째가 있다는 사실이다.

뭐든 그렇다. 처음이 어려운 거지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온다. 걷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이제 상대방의 ’how are you‘에 당당히 눈을 맞추며 대답할 줄 알고, ’have a good day’를 먼저 말하며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물론 여전히 영어로 긴 문장을 말해야 할 때는 미소를 띤 채 남편만 쳐다보곤 한다.

그래도 나는 조금씩 나아지는 나에게 집중한다. 다음에는 분명 미세하더라도 조금 더 나아질 테니까.


언젠가는 울지도, 어색하게 웃지도, 남편을 간절히 쳐다보지도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말하고 싶은 모든 게 영어로 술술 나오는 그런 날이 온다면 과거의 나에게 꼭 말해 줘야지.

고맙다고, 내 지금의 성공은 계속 실패했던 네 덕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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