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겁쟁이에겐 조금 다른 여행

미국에 간 겁쟁이 외계인 시리즈

by 글동

여행이란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걸 말해보겠다. 낯섦, 스트레스, 아픔. 나는 이런 것들이 설렘, 자유, 휴가 같은 것보다 더 먼저 떠오른다.

특히 해외여행을 가기 전날에는 어떠한 기분들이 나를 압박해 온다. 답답함이나 막막함 같은 단어로도 설명이 안 되는 아주 집요하고 끈적한 기분들. 챙겨놓은 짐들이 밤새 어딘가로 도망가버릴 것 같은 기분, 클렌징 오일이 새면서 캐리어 속을 다 더럽힐 것 같은 기분, 갑자기 여권이 증발될 것 같은 기분, 내일 아침에 반드시 뭔가를 빼먹고 공항에서 돈 낭비 할 것 같은 기분.


그렇다. 나는 해외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국내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국내여행은 낯설지 않고, 귀찮은 일이 별로 없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바리바리 짐을 싸야 한다거나, 입국심사 서류 같은걸 미리 신청해야 한다거나, 말이 통하지 않아 손해 보는 등의 일들 말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주로 휴양지를 선택하고 휴양지에서도 행동반경이 크지 않다. 보통 휴양지는 섬 투어나, 스쿠버다이빙 같은 프로그램이 많은데 난 물은 물론이오 수영도, 배 타는 것도 무서워하는 쫄보 중의 쫄보다.

휴양지에서 정말 말 그래도 ‘휴’만 하는 사람, 그게 나다. 난 다양한 액티비티에 쓸 수 있는 돈을 모조리 숙박비에 투자하여 끝내주는 숙소에서 끝내주게 가만히 있는다. 좋은 숙소에서 재밌는 책 읽기. 그게 내가 원하는 여행의 전부다. 해외여행 중 맘에 드는 한 식당을 찾으면 그 식당만 여러 번 찾아가고, 마사지도 한 마사지샵에서만 주구장창 받는다.


이런 여행스타일은 도전을 싫어하고 낯선 것을 꺼리는 나의 성향에서 도래되었다. 난 여행계획 세우기도 아주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P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말 완벽한 J(통제형)이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통제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사실 애초에 통제할 수 있다면 여행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렇기에 여행은 내게 아주 큰 과제다.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울보가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매 여행마다 울어버릴 순 없으니 나는 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건 바로 ‘계획 없음’을 계획하는 것. 계획을 망침으로써 올 수 있는 거대한 스트레스를 애초에 틀어막아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여행을 가면 자주 아픈 스타일이라 해외여행에서 앓은 경험이 아주 많다. 친구와 함께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응급실행을 고민할 정도로 숙소에서 바닥을 기어 다녔고(결국 그날 친구는 혼자 외출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간 뉴욕에서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구토로 밤을 마무리지었다. 평소에도 예민한 몸덩이지만 여행만 가면 예민 가시가 2배는 돋아 몸과 마음이 쉽게 가라앉아버린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친한 사이어도 내가 먼저 여행을 제안하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 내 인생에 여행이 절대 없다는 건 아니다. 여행 준비와 여행 과정에서 겪었던 불편감만큼 여행 이후에 남는 좋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됐고 나 혼자 떠난 여행에서는 나 자신을 더 존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어떨 때 더 행복감을 느끼는지 나는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그 맛을 알아버린이상 아마 나는 그런 불편감을 다 감수하고 또다시 여행을 드문드문 떠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미국생활도 긴 여행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미국에 오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도 정말 힘들었고, 미국에 온 현재는 매일매일 불안과 싸운다.

하지만 이 긴 여행이 끝나면 또 평생 기억하고 싶은 좋은 것들이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안과 더 열심히 싸워야겠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즐겨야겠다. 여행처럼, 모든 걸 물 흐르듯이 보내면서.


Q. 여러분에게 공항은 어떤 공간인가요? 저에게 공항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시한폭탄 같은 곳입니다. 공항에서는 늘 마음을 졸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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