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나를 안아주는 순간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
- 알베르 까뮈 -
‘인간의 생애가 1년이라면, 오늘이 마지막이군!’
12월 31일 밤, 송년미사에 참석하면서 상상에 빠집니다. 올해의 10대 뉴스가 인생의 10대 뉴스로 바뀌더니, 올해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은 인생의 최고 기쁨과 슬픔이 무엇인가로 바뀌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질병과 고통에 무너지는 사람들, 응급실로 들이닥친 청천벽력의 소식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한 임종을 기다리는 호스피스 환자들과 눈물과 기도로도 어쩔 수 없는 슬픔들을 접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인간 존재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 자각하기 힘들 뿐, 우린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친구입니다.
‘마마스 앤 파파스 밴드’
중국집 메뉴 같은 ‘마파 밴드’는 두 달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왕년에 음악 좀 하신 분들 모여보자’는 성당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고민을 하다가 신청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밴드?’라는 생각과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다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문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여 보니, 악기를 다룬 경험도 적고 공연 경험도 없이 열정만 있는 아마추어들의 모임입니다. 그래도 열정의 힘은 위대합니다. 토요일마다 땀 흘려 연습하고, 신고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가고 새해를 맞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신부님이 밴드를 소개하고 우리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늘을 산다는 것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가 부족해도, 가난해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랑노래와 ‘꽃’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우리는 노래의 메시지가 온전히 전달되도록 마음을 담아 정성껏 불렀습니다. 성당에서는 밴드를 시작했지만, 병원에서는 오래전부터 환자들을 위한 노래를 해왔습니다. 공연을 준비하고 사람들과 화음을 맞추고 연습을 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피로와 목감기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는 ‘오늘’을 살더군요.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에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고, 그냥 오늘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술가는 못되고 음악을 즐기는 수준이지만, 음악은 제 삶이 가장 기뻐하는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의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며 끝나는 삶이라..!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웃었습니다.
지금은 음악일지라도 살다 보면 바뀔 수도 있겠죠. 그래도 잊지 않을 겁니다. 생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생의 첫 날을 시작하기.. 내 삶이 가장 기뻐할 일을 오늘 시작하기... 그것이 노래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글쓰기든, 아니면 사랑이든...
참, 관객들 반응이 어땠냐구요?
노래가 끝나자, 커다란 파도가 덮쳤습니다. 우우와와아~~~~~~앵콜! 앵콜!
성당에 가득 찬 수백 명이 몰아치는 박수소리에 아직도 귀가 얼얼합니다. 처음으로 무대에 선 동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공연 경험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렇게 마음을 담은 박수와 함성은 오랜만이었습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하고 싶었던 일로 한 해를 마감해서 기쁘고
사람들에게 진정 어린 박수를 받아서 기쁘고
제일 좋은 것은 노래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을 노래해서 제일 기쁘군요.